어느 날 스님 한 분을 만났다. 세상 사는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문득 스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스님,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게 참 힘든 것 같아요. 스님은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으세요?” 스님은 해맑은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운 채 이렇게 이야기했다. “친한 사람을 멀리하고, 어렵고 불편하고 친하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해요.”

   마치 선문답 같았다. 친한 사람을 멀리하라니. 가까이하고 싶어서 아주 어렵게 친해진 사람들인데, 구태여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니. 불편한 사람, 미운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가까이하라니. 웬만한 일에 놀라지 않는 나의 무뎌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에이, 싫어하는 사람을 어떻게 가까이해. 그 사람의 뒤통수만 봐도 얼른 숨어버리고 싶은걸’. 내 마음속에서 시끄러운 투덜거림이 시작됐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투정을 부린다. 스님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싫어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은 의외로 쉬워요. 가까운 사람을 멀리하는 게 훨씬 더 어렵거든요.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보는 게 훨씬 어렵기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은 오히려 쉽게 느껴져요.”

   마음속에서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친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 보고 싶은 사람을 멀리하는 게 훨씬 더 어렵구나. 못 견디게 그리운 사람을 멀리하는 게 훨씬 어렵기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겠구나.

   스님의 말씀과 눈빛을 가슴에 하나하나 새기는 동안, 스님이 그동안 견뎌왔을 그 오랜 외로움의 시간이 내 가슴속에 노을처럼 물들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떨어져서 자란 스님을 자식처럼 자매처럼 사랑해주신 큰 스님을 비롯한 다른 도반들을 멀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어버이날’에 어머니보다 더 큰 사람을 주신 큰 스님을 챙기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그리운 사람을 너무 가까이 두는 것이니 일부러 ‘스승의날’에 큰스님을 챙긴다는 말씀을 듣고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스님은 너무 많이 사랑하지 않기 위해, 아니 너무 많은 사랑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깊은 사랑조차 숨기는 게 아닐까.

   그날 스님과 나는 처음 만났지만 깊은 자매애를 느꼈다. 처음 뵙는 스님을 향해 ‘우리’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 줄을 몰랐다. 며칠 후 스님은 나에게 무려 ‘카톡’을 보내셨다. “제가 아는 분이 여울 씨 책을 소개해줘서 읽고 있는데, 참 좋네요. 왜 이제야 알았을까 싶습니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그 이후로 스님을 아주 오래오래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워하는 사람을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셔서, 마음대로 연락도 못 하고 말이다.

   그러던 중 『무비 스님 직지 강설』이라는 책을 만났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스님의 다정다감한 말씀 같았다. 그러고 보니 스님은 내게 화두를 던져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증오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라. 그 마음이 너무 크고 깊어서, 그 숨은 뜻이 너무 넓고 아득해서 스님에게 차마 다가갈 수 없었다.

   그리운 스님께 연락하는 대신 『무비 스님 직지 강설』을 스님과 대화하듯 아주 조금씩, 가장 달콤한 초콜릿을 아껴 꺼내먹듯 그렇게 한 장 한 장 읽어가고 있다. 예전 같으면 어려워서 벌써 포기했을 책인데 스님의 해맑은 우정을 가슴에 품어 안고 읽으니 천상의 멜로디처럼 그윽하고 달콤하다.
 
자네가 여기에 온 다음부터 나는 일찍이 그대에게 마음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대가 차를 가지고 오면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받아주었으며, 그대가 밥을 가지고 오면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받아주었으며, 그대가 나에게 인사를 할 때는 내가 곧 머리를 숙였으니 어떤 점이 그대에게 마음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하는가?


   『무비 스님 직지 강설』 중 위의 구절을 읽으며 마음 한구석이 무척 뜨끔했다. 그 모든 자잘한 행동들 눈빛들 표정들 모두가 ‘그대를 위해’ 지은 것들임을 알게 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하겠는가. 글 한 편을 쓸 때도 ‘될 수 있으면 아름다운 문잘’을 써보겠다고 골머리를 앓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소중한 가르침은 어떤 눈부신 하이라이트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인생에는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이 없다. 모든 것이 발단이고, 모든 것이 절정이며, 모든 것이 결말이다. 이별은 사람의 결말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의 시작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별함으로써 그 사람과의 더 큰 인연을 만들어가는 도장의 시작일 수 있다.

   생명의 탄생 또한 그렇다. 탄생은 시작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가 이별의 암시다. 우리는 탄생하는 순간 각자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을 예약해놓는 셈이다. 그 예약은 100퍼센트 지켜진다. 사랑하는 것들과 이별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내 가슴이 제대로 뛰고 있는가. 이미 오래전에 멈춰버린 것은 아닌가. 내 사랑은 실은 나 자신을 위한 이기심이나 초라한 변명은 아니었던가.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면서 어떻게든 그 사랑의 동아줄을 앙칼지게 틀어쥐려는 소유욕은 아니었던가. 일한답시고, 더 좋은 성과를 내어야 한답시고 내 곁의 사람들을 외롭게 하지는 않았는가.

   『무비 스님 직지 강설』의 또 한 구절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고정간 선사가 초면에 강을 사이에 두고 덕산 선사를 보고는 멀리서 합장하며 말하였다.

“안녕하십니까?”

덕산 선사가 손에 든 부채로써 부르는데 고정간 선사가 홀연히 깨달았다.

그리고는 강을 따라간 후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만나지 않아도 만난 것 같은 사람. 멀리서 그 얼굴만 보아도 좋은 사람이 있다. 내 마음속에 어떤 욕심의 씨앗이 싹트는 순간, 무언가 더 열정적으로 일하고 싶고 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싶은 욕심이 드는 순간. 아차, 싶다. 그런 욕심의 쇠사슬에 스스로를 결박해버리면 어떻게 내 의지로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만남이란 그런 것이다. 내 안에서 진짜 나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면 굳이 위대한 스승을 만나 설법을 구하지 않아도 좋다. 스님 한 분을 만나기 위해 삼천 배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그 용기만 있다면.

   아,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그리운 스님의 미소가 너무도 선연하게 눈앞에 아른거려 그만 스님에게 ‘카톡’을 보내고 말았다. “스님, 보고 싶은 사람일수록 멀리하라 하셔서 참고 또 참았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나의 눈부신 스님은 이 덜떨어진 중생의 무리한 부탁을 전혀 거절하지 않는다.

   스님의 꿈은 사람들이 언제든 지친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자그마한 ‘붓다카페’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 어디에서 ‘붓다카페’를 만들어 고운 스님의 미소를 뭇 중생들과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아차,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이야말로 붓다카페였구나. 나처럼 게으른 중생도 『직지』의 영롱한 아름드리 그늘 속에서 쉬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은 단지 사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머물 수 있는 진정한 깨달음의 장소가 아닐까.

글 출처 : 그때, 나에게 미처하지 못한 말(정여울, arte)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