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에서 친구가 찾아와 만났다.
몸이 으슬으슬 춥고 한기가 느껴져 소주 한 병 나누어 마시고 9시쯤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고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 뒤적거리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 액정에 친구의 이름이 보였고 반가움에 후다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여, 친구야~"
"알어.ㅎㅎ"
"어디냐?"
"왜?"
"가까이 있음 술 한잔 하자고..."

올려다 본 시계가 9시 30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친구가 부르면 새벽에도 달려 나가던 나였지만 그날만은 아니었다.
몸도 기분도 영~ 바닥이라서 좀 귀찮기도 했다.

"왜, 무슨 일 있어?"
"나... 지금 기분 엄청 나쁘거든?"
"뭔 일인데..."
"그건 만나서 이야기 하고 일단 나와라, 술 한 잔 하자"
"저기... 종근아, 내일 만나면 안될까? 내가 좀 멀리 있거든."
"어딘데... 거리가 멀어?"
"응... 낼 보자, 응?"
"그래, 그럼 내가 내일 점심시간에 맞춰 전화할게"
"그래, 오늘은 그만 마시고 낼 나랑 마시자."
"아니, 혼자 조용히 한 잔만 더 하고 들어가지, 뭐..."
"그러지 말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 내일 나랑 흠씬 취해보자"
"하하하... 그래, 일찍 들어갈게. 딱 한 잔만 더 하고..."

다음 날 기다려도 전화가 안 오길래 내가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공허한 멘트만 앵무새처럼 반복해 들린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는 친구였기에 이상하기는 했지만 곧 연락이 오겠지... 란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고 다음 날이 되었다.

"이 녀석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친구를 향해 궁시렁대며 다시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아, 이 번호... 안종근씨 전화 아닙니까?"
"맞는데요."
"그래요, 잠시 통화좀 할 수 있을까요."
"지금 통화는 좀 그렇고...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예... 친굽니다만..."
"지금 병원 응급실입니다. 검사중이라서 통화는 좀..."
"예? 응급실이라니요?"

순간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들,
이 웬수가 또 어제 술 많이 마시고 넘어졌구나.
그렇게 일찍 들어 가라고 했건만 말 안 듣고...

다시 물었다.
"어디가 많이 다쳤습니까?"
"그게 아니고 쓰러져서..."
이게 대체 뭔 소린지 머릿속이 어지럽게 회전했지만 당최
어떤 답도 얻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게 좀... 직장 동료라서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내일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뭐, 아무 일도 아니겠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내 털어내려 했고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
"여보세요, 어제 전화드렸던 종근이 친굽니다"
"아, 예..."
"지금도 통화, 어렵습니까?"
"그게 좀..."
"그래요, 그럼 지금 병실입니까?"
"예..."
"몇 호실인지..."
"409호실입니다"
"알겠습니다..."
기재와 영규랑 친구가 입원해 있다는 수원 성 빈센트 병원으로 달렸다.

병실앞에 걸린 이름을 확인하고 들어선 순간 쿵~ 가슴이 내려 앉았다.
며칠 사이에 수염이 자라 온 얼굴을 덮었고 초췌해진 얼굴로 나를 보며
힘없이 웃어주던 친구의 쓸쓸한 미소가 명치끝을 누른다.

병실을 지키던 친구 아우에게 들은 이야기는 나를 더욱 아프게 했다.
나와 통화를 끝내고 바로 집으로 갔던 친구는 혼자 쓰러졌고 첫사랑을 못잊어
아직도 싱글인 친구는 그렇게 꼬박 이틀을 혼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힘든 사투를 벌여야 했단다.

옆에 누군가만 있었더라도, 빨리 병원을 찾기만 했더라도 내 소중한 친구를
이렇게 슬픈 모습으로 마주하지는 않아도 됐으련만...
혼자 사는 외로운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답안지를 들여다 보는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저리다.

뇌졸증,
평소에 혈압도 정상이었고 산악회 회원으로 산에도 휴일마다 가던 아주
건강했던 친구였는데 요즘 다니는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에 시달려 그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나 보다.
이야기를 들으니 내게 전화했던 그 날이 바로 부도처리 되어 최종 확정 발표된 날이었단다.
오른쪽 수족이 마비됐고 언어장애로 말문까지 닫아버린 친구의 기막힌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비참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난 아무 말도 못하고 친구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날 전화 했을 때 나가기만 했더라도..."
"몸이 좀 불편했어도 같이 있기만 했더라면..."
"답답한 속내 털면서 술 한잔 했음 이렇게 혼자 쓰러지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을..."
"미안하다, 친구야..."
울음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내 말을 듣던 친구는 내게 도리질을 한다.
일그러진 웃음을 머금은 채...

내일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친구 손 한번 힘주어 쥐었다 놓은 후
병실을 나서며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기가 막히고 너무 가여워서,
또 다른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두려운 마음에,
밤새 안녕이라더니 어떻게 이런 일이...

나랑 낚시가자더니,
늙어 죽을 때까지 끝까지 손 놓지 말자더니,
너...
이럼 안되는 거 알어?
나쁜 친구야...


※ 쓰러져 병원에 있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