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꽃/도종환


세월의 물가에 나란히 앉아
나리꽃만 한나절 무심히 바라보았으면 싶습니다.
흐르는 물에 머리감아 바람에 말리고
물소리에 귀를 씻으며 나이가 들었으면 싶습니다.
살다보면 어느 날 큰물 지는 날
서로 손을 잡고 견디다가도
목숨의 이파리 끝까지 물은 차올라
물줄기에 쓸려가는 날 있겠지요.
삼천굽이 물줄기 두 발짝도 못가서 손을 잃고
영영 헤어지기도 하겠지요.
그러면 또다시 태어나는 세상의 남은 생애를
세월의 어느 물가에서 따로따로 그리워하며 살겠지요.
그리워하다 목이 길어진 나리꽃 한 송이씩 되어
바위틈에 서고 잡풀 속에 서고 살아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