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엠엠 재즈(MM JAZZ)라는 잡지에 2002년 4월 부터 연재 했던 내용입니다.
재미 없는 넋두리 같은 글이 부끄럽습니다만 이왕 시작한거니까 귀엽게 봐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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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오디오라는걸 산 게 고등학교 2학년 때 쯤인가.....
아무튼 그 언저리 였던것 같다.
한 동네에 살던 사람들이 이사를 하는데 구경하다보니
기다란 설합장 처럼 생긴 전축이 눈에 띠었다.
그 즈음 나는 낡은 라디오 말고 제대로 된 오디오가 갖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던 때 였다.
나는 전축 옆에서 어슬렁 거리면서 그 곁을 뜨지 못 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에 이삿짐의 주인인듯 한 아주머니가
나를 한번 흘깃 쳐다보더니 다시 짐을 나르러 들어갔다.

가까이 가서보니 앞 쪽 판넬에는 AM,FM
그리고 단파 방송까지 들을 수 있는 튜너가 있고,
앞 면 하단부가 손 잡이를 당기면 밑으로 열리면서
안 쪽에 턴 테이블이 자리잡고 있는 형태의 국산 전축이었다.
"TR식 일까,진공관 식일까?"
가구처럼 생긴 윗 판넬의 앞 쪽 모서리에 독수리 문양이 보였다.
천일사 독수리표 전축.......
당시에는 천우사,천일사,금성사 등의 가전 회사들이 있었는데
천일사의 독수리표 전축은 꽤 성능이 좋은 물건이었다.
나는 전축의 뒷 판넬 쪽으로 가서 작은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았다.
큰 덩치에 비해 전축안은 의외로 텅 빈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잠시후 전축안의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내용물들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축 바닥에 놓여 있는 기판위로 작은 부품들과
제법 묵직해 보이는 트랜스 등이 보였다.
양 쪽 옆으로는 큼직한 스피커가 전축의 전면을 향해 부착되어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바닥의 기판에 양 쪽으로 대칭되게 가지런히 꽂혀있는 자그마한 진공관들.......
진공관식 이었다!

나는 저진공관에 불이 들어오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상상을 하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이 봐! 학생!" 하는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니 아까 그 아주머니와 아주머니의 두 배쯤 되어 보이는
덩치 큰 아저씨가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잠시후 "그 전축이 갖고싶니?"하는 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얼떨결에 "아.. 아니요. 혹시 파실꺼면 제....제가 살려구요..."
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이녀석! 안 팔아 어서가!'
하는 소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래? 돈은 있냐?"
"이사가는 집이 좁아서 그 전축을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잘 됐구나!"

아니 이게 뭔 소리란 말인가?
"아아... 예,집에 가서 가져 와야 되는 데요?"
"그래? 곧 차가 떠나야 되니까 4만원(?) 만 가지고 오너라!"
나는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그 전축을 한 번 힐끔 쳐다본 뒤 곧장 집으로 달렸다.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두 아닌데 가슴이 괜히 쿵쿵 뛰었다.
집에 오니 어머니가 배고프지 않냐며 얼른 밥을 차려 주셨지만....
전축,진공관,4만원....이런 단어들이 머릿 속을 맴 돌았다.
나는 밥을 먹었는지 어쨌는지 하고는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시계를 보니 아까 그 이사하는 아저씨와 헤어진 지가 30분은 넘은것 같았다.
가슴은 아까보다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시계 바늘 움직이는 소리까지 합세해서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께 가서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머니 주위를 맴 돌았다.
어머니는 점심 먹은게 속이 않 좋은거 아니냐며 얼른 화장실로 가라고 하셨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문채 어머니께 말슴을 드렸다.
"엄마! 나 전측 사게 4만원 만 주세요!"
....................

한 참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
내귀가 의심 스러운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어디가면 살 수 있니?"

사실 내가 어머니께 전축을 사 달라고 조른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라디오도 다 낡아서 재봉틀 기름을 치고 손잡이를 좌우로 백 번 쯤 돌려야
제대로 소리가나는 우리집 형편에 전축이라니....
한 마디로 '너 제 정신이냐?' 가 당연한 시절이었다.
나는 그 때 내가 어머니께 뭐라고 얘기를 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전축을 꼭 사야되며,그 값에 사면 엄청 싸게 사는거며,
사 주시면 음악만 듣지 않고 공부도 이제부터 열심히 하겠노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설명을 늘어 놓았을게 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어머니와 함께 그 전축을 집에까지 낑낑대고 끌고와
내 방에 한 쪽 벽을 거의 다 차지하도록 곱게 모신 다음
떨리는 손으로 전기 코드를 벽에 꽂으려는 순간
어머니가 내게 하신 말씀은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 오셔서 물으시면......
이사가는 사람이 버리려고 해서 주어 왔다고 말씀 드려라!"

나는 "네! 알았어요"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전축의 다이얼 스위치를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렸다.
'딸깍!'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전면 판넬에 파아란 불이 들어왔다.
유리로 만든 판넬 뒷 쪽에 작은 램프가 켜지면서 바탕은 파랗고
싸이클을 가르키는 글씨 부분은 안 쪽의 노란 불 빛이 그대로 보이는 그런 식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유리판넬의 파란 불 빛너머로 그대로 빨려 들어갈것만 같았다.

나는 친구녀석이 형한테 들키면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며,
안 된다고 발발 떠는걸 얼르고 달래서 그 녀석의 형 방에서 몰래 가지고 온
-GRAND FUNK-의 앨범을 조심스럽게 꺼내서 전축 판넬의 불빛에 비쳐 보았다.
어둠속에서 검은 음반위에 푸르스름한 불 빛이 비추이자
음반위에 나 있는 수 많은 가느다란 줄들이 나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산 지 얼마 안 된 새 음반인것 같았다.

1번 트랙-Heart Breaker-
2번 -Locomotion-
-Inside Looking Out- 등등의 곡명들이 보였다.
나는 행여 손 때라도 묻을까 조심 조심 그 앨범을 턴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전축의 쎌렉터를 PHONO로 돌린다음 암을 들어 바늘을 확인했다.
턴 테이블이 놓여있는 안 쪽에는 암(arm)을 들어 올리면 작은 등이켜지게 되어 있어서,
음반위의 트랙과 트랙사이에 정확히 바늘을 올려 놓을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런데도 나의 손은 마치 추운 겨울에 개울에 떨어졌다 나온 심봉사의
지팡이 잡은 손 처럼 와들 와들 떨고 있어서
도저히 바늘을 음반위에 정확히 내려 놓을 수 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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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어서 다음에 다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