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때 삼천궁녀가 존재했을까?
④‘야사’와 ‘전설’
백제여인의 정절을 미화시킨 표현으로 봐야
왕이 앉기전 스스로 데워진 돌방석 ‘자온대’
역사속 정사.야사는 ‘동전의 앞뒤’처럼 공존


역사가 오랜 나라와 그 민족들에겐 신화(神話)와 전설(傳說) 따위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설과 신화는 픽션(fiction)의 성격이 짙지만 실체[正史]보다 훨씬 재미있게 다가온다. 서양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리스’와 ‘사라센’, ‘이집트’문물 속에 피[血粒]처럼 그것이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도 ‘전설천국’에 속하는 나라지만 신라의 시조가 알[卵]에서 왔다느니 일본의 개국신(신무천황)은 하늘에서 강림했다고 부풀려대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제주도 고, 부, 량(高, 夫, 梁) 3씨(氏) 시조가 땅굴에서 나왔다고 믿는 경우를 우리는 지켜본다. 이에 비해 백제 건국은 실존, 실체에 근거한 것이라 자랑하지만 그렇다고 ‘전설’과 ‘야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 예를 찾아보자.

낙화암과 ‘삼천궁녀’

▲ 낙화암
부소산 꼭대기에서 백마강을 굽어보는 절벽 그 일대를 ‘낙화암’이라 부르는데 조선후기까지는 추사암(墜死岩)이라 칭했다.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뜻이지만 훗날 어느 풍류객[歌人]이 나당군에게 굴종(屈從)을 않고 투신한 궁녀들을 꽃으로 분장시킨데 연유한다.

그렇다고 의문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굳이 꼬집자면 ①백제왕궁에 과연 삼천궁녀가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부여 도성엔 전성기 때 13만 호가 밀집, 왕도를 이뤘다니 약 40만 인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궁터가 어디냐를 놓고 설왕설래해왔지만 아무래도 오늘의 부여읍 중심지에 궁궐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삼천궁녀란 더떻든 부풀린 숫자일 것이다.

그러니 그저 많은 궁녀가 있었다는 이야기일수 있다. ②삼천궁녀가 투신자살했다면 아마도 지금의 서해(장항~군산) 금강입구까지 시신으로 덮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나와 있지 않으며 다만 백제여인들의 정절(貞節)과 올곧은 몸가짐을 궁녀들에 빗댄 의도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추사암’을 ‘낙화암’으로 개명한 것을 굳이 나무랄 일도 아니다. 역사란 얼마간 ‘이니그마(Enigma)’의 생리를 지니며 또, 포장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간의 미화(포장)는 당연하다.

‘조룡대’에 얽힌 전설

낙화암 강기슭에 조룡대(釣龍臺)라는 꽤 넓은 돌 바위가 있다. 홍수 때는 강물 아래로 잠기다가도 건조기엔 제 모습을 드러내는 용바위…. 그 바위 표면엔 직경 20여㎝ 가량의 둥근 자국이 파여 있다. 그것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용을 낚아 올릴 때 파인 무릎자국이라 전해온다. ‘소정방’이 부여도성을 치려 백강을 건너려하자 돌연 칠흑 같은 하늘엔 폭풍이 몰아치고 강변엔 짙은 안개로 군선이 제구실을 못하자 소정방이 묘책을 썼다는 전설의 바위…. 이는 백제용의 장난[作戱]이라며 ‘소정방’은 자신의 애마(백마) 목을 뎅겅 잘라 그것을 미끼로 용을 낚아 올렸다 해서 ‘조룡대’라 불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황당무계한 ‘픽션’일 뿐 아무리 ‘역발산, 기개세’하는 장사라 한들 말대가리를 미끼로 용을 낚을 수는 없을 것이고 또 용(龍)의 실체가 있었느냐는 반문도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용을 낚아 올릴 때 힘을 준 무릎자국이 돌에 파였다니 이는 분명 실화 아닌 전설일 수밖에 없다. 또 이 바위는 ‘소정방’이 백제도성으로 가는 길목이 아니라 도성귀퉁이에 자리하고 있어 이 점도 설득력이 없다. 그럼 용의 실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공룡(恐龍) 이전에 청룡, 황룡, 비룡, 반룡, 흑룡, 해룡 등이 있었다고 한자문화권에선 믿어왔다.

용이란 하늘을 상징하고 때론 왕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왕의 의자를 ‘용상’, 왕의 얼굴을 ‘용안’이라 했고 ‘대궐’과 ‘사찰’, ‘정자’, ‘농기’ 등에 용을 그려 넣기 일쑤였다. 그러나 한.중.일 세 나라는 용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각기 다른 해석을 한다. 중국에선 뱀이 천 년간 도를 닦아 성룡하는 것이라 해서 사룡설(蛇龍說)을 고집하고 일본에선 해룡설(海龍說)을, 우리 한국에선 민물고기가 천년을 묵어 지느러미에 이끼가 돋고 콧등에 수염이 자라면 용이 된다는 어룡설(魚龍說)이 있다.

그러면 ‘조룡대’ 성격은 어떻게 파악하고 또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가닥을 잡으면 어떨까 한다. 말대가리를 미끼로 용을 낚아 강심을 달랬다는 건 허망한 주장임으로 도성이 불타자 ‘소정방’이 휘하 장수들과 그 바위에 앉아 의자왕(龍)을 낚았다며 축배를 든 곳이라 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싶다. 차라리 그 편이 설득력을 갖는다 할 것이다.

‘자온대’이야기

▲ 곰나루
공주.부여 지방에 가면 도처에 ‘유적’과 ‘전설’을 만나게 되는데 그 까닭은 그곳이 옛 백제의 서울이었기 때문이다. 백마강변에는 지금도 ‘자온대(自溫臺)’라는 명승지가 전해오지만 이는 하나의 정자(亭子)였다. 이 정자에는 왕이 자주 나와 신하들과 경세(經世)를 논하고 ‘심심파조’로 한담(閑談)을 즐기는 한편 때론 풍악도 울렸다.

예나 지금이나 정자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기는 휴식 공간 구실을 해온 셈이다. 헌데 이 정자 밑바닥(돌)은 어찌된 일인지 왕이 임석하면 늘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스스로 따뜻하게 달아오르는 돌 방석. 그래서 왕은 늘 만족해했다. 칼바람이 강변을 후려치며 백강이 꽁꽁 얼어붙는 엄동설한에도 이 돌 방석만은 스스로 달아오른다고 해서 ‘자온대’라 불렀다. ‘신통하구나! 늘 이렇게 따끈따끈 달아오르니….’ 왕이 이쯤 나오면 ‘천지신명이 폐하의 홍복을 높이 사셔서….’ 어쩌고 하며 신하들은 아첨을 했을 게 분명하다.

이 돌 방석은 늘 스스로 데워지는 것으로 전해오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옛날이라 해서 그와 같은 해괴한 일이 있을 리 없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생겨났는가. 왕이 이곳에 행차하기 전 신하들이 사전에 숯불을 피워 이 좌대를 데워놓았던 것이다. 유형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일본에도 비슷한 사례는 있었다. 전국시대 으뜸가는 무장 ‘오타노부나가(織田信長)’의 소년 몸종 ‘기노시타(木下藤吉郞)’의 행동이 이와 흡사했다.

천하의 무장 ‘오타’가 겨울철 일찍 일어나 ‘조오리(草履)’를 신으면 늘 따뜻해서 이상하게 여겨왔는데 알고 보니 몸종 ‘기노시타’의 소행 탓이었다. 동이 밝기 전 소년 몸종은 주군의 신발을 가슴에 품었다가 내놓는 바람에 그토록 따뜻했던 것이다. 이는 아첨이 아니라 주군에 대한 충정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지모에도 뛰어나 주변을 따돌리고 성장가도를 달렸다. ‘짧은 창’과 ‘긴 창’ 논쟁 끝에 양측은 대결했지만 그는 ‘긴 창’으로 ‘짧은 창’을 제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소년 ‘기노시타’는 이후 승승장구 천하를 호령하면서 ‘도요토미(豊臣秀吉)’로 탈바꿈한다.

‘곰나루’ 설화

공주를 일명 웅진(熊津)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지명이 어째서 ‘곰나루’인가. 여기엔 기막힌 전설[哀話]이 전해오며 지명고(地名考)에도 그 내용이 담겨져있다. 옛날 옛적, 이 강가에 한 어부가 살았는데 ‘아미산’동굴에 서식하는 암곰이 일상 이 어부에 연정을 품어오다 끝내 본성을 드러냈다.

곰은 이렇게 나왔다. 자신과 결혼을 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잡아먹겠다고 나오는 통에 어부는 이를 허락하고 말았다. 이후 곰은 지성으로 어부를 섬겼고 그 바람에 두 애까지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어부는 하도 인간세상이 그리워 작심을 한 끝에 강을 건너 마을로 도망쳐버렸다. 이때 곰은 분하고 원통해서 두 애들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져 죽어버렸다. 이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 강변을 ‘곰나루’라 일러왔다는 것인데 듣기에 민망하다. 인간이 어떻게 곰과 동거할 수 있으며 숱한 짐승 가운데 하필이면 곰이란 말인가.

하지만 곰은 꿈을 지닌 동물로 인종(忍從)할 줄도 아는 영물, 그리고 날쌔고 재주가 많아 우리 민족과는 별난 인연을 갖고 있는 비스트(Beast)…. 민족의 시조 ‘단군’ 모(母)가 곰[熊女]이었다는 신화에서부터 ‘곰나루’전설[哀話]이 이렇듯 연면하게 전해온다. 뿐만 아니라 옛날 백제의 담로(擔魯)였다는 일본 ‘구마모토’ 역시 곰의 설화와 무관하지 않다. 백제에도 전설과 야사가 수없이 많지만 백제 파국 시 왕도의 분위기를 전하는 우화에 이르면 가슴이 섬뜩해진다.

초기에는 영명하고 호쾌했던 의자왕이 신라의 여러 성(城)을 뺏자 오만해지기 시작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왕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 한 탓에 늘 용상을 비웠다고 전해온다.

그 퇴폐상이 아무리 꾸며낸 이야기라 해도 우리들 후예입장에선 접하기 민망한 내용들이다. 도성엔 신라의 첩자가 밤낮없이 드나들고 밤중이면 왕궁 뜰 고목나무가 ‘백제는 망한다!’고 통곡했다는 것이 아닌가. 전해오는 ‘괴담’은 이에 멈추질 않는다. 하늘에선 천둥을 치며 검붉은 비[血雨]가 내리는가 하면 용상에는 여우가 턱을 괴고 앉는 일이 빈번했고 벽에 그린 용이 피를 토하며 눈을 감았다는 등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야사’. ‘전설’도 민족자산

‘야사’와 ‘전설’은 자칫 실체와 본질을 모호하게 오도하는 독소라 해서 폄하하기도 한다. 역사 정리와 유물을 캐내는(引揚) 그 자세를 놓고 광맥을 캐 들어가는 광부의 그것에 비유하기도 하고 또, 금붙이를 주무르는 장인에 견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실체와 근간, 진면목(眞面目) 이외의 것, 전설과 ‘우화’ 따위는 광산촌에 나뒹구는 ‘버럭’쯤으로 취급해버린다.

하지만 전설과 야화도 소중한 민족적 정신유산이라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본질과 근간은 ‘노른자위’요, 야사와 전설은 ‘흰자’와 같은 것. 이 양자를 표피(表皮)로 감싼 것을 계란에 비유하기도 한다. 실체와 전설은 그래서 ‘동전의 앞뒤’처럼 두 얼굴을 갖는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