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 생활중의 미소라는 제목으로 평생교육원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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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초 급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서울 삼성병원 응급실을 통하여 긴급 입원하게 되었다. 항암제 투여로 인한 입 퇴원을 반복하며 마지막 조혈모 세포 이식 단계까지 오 개월이 넘도록 격리된 무균실에서 병마와 싸우며 힘든 나날을 보냈다.

이제 열흘 후면 면역억제제 복용도 끝날 정도로 혈액 수치도 정상이며 이 모든 것이 주위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와 염려 덕분이며 평생 갚아도 못 갚을 은혜를 입은 것으로 감사의 표현이 불가능하다. 입원 생활을 마감한 지금의 나로서는 먹을 것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주어진 시간 내 마음대로 써가면서 예전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니 인간에게 주어진 참 편한 ‘망각’이라는 기가 막힌 선물로 인하여, 숱한 나날을 같은 입원실에서 고통을 겪던 환우들의 얼굴마저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통원 치료차 주기적으로 가는 조혈모 이식 클리닉 실에서 한동안 같은 병실에 있었던 스무 살짜리 준혁이란 아이와 보호자인 엄마를 만났다. 너무 반가웠다. 두 번이나 재발하며 일 년을 넘게 투병 생활을 하는 아이는 침대에서 머리를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힘이 없어 눈썹 하나 없는 파리한 얼굴에 눈인사만 끝내고 눈길을 거두는데 가슴이 저려왔다.

워낙 오랜 세월을 입원한지라 격리실의 소식통으로 알려진 그 아이의 엄마에게 같이 지내던 환우들의 소식을 물었다. 나와 같이 6인실에 입원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입 퇴원을 반복하며 거의 같은 시기에 이식까지 끝냈으며 나이도 아래위로 서너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환우들이다. 안타깝게도 내 앞과 옆에 세 분 다 저세상으로 가셨다고 하여 한동안 충격에 쌓여 있었다.

일주일 이주일 간격으로 통원 치료를 다니며 같은 병동 11층에 있는 병실 면회조차 가보지 않고 지내오다니 나도 참 무심한 사람이지, 그 소식에 너무 가슴이 아파 며칠을 넋이 나가 있었다. 사람 목숨이란 게 꽤 모질어서 그리 쉽사리 세상 등지지 않는다고 믿고 사는 나한테는 참으로 우울한 소식일 수밖에 없었다. 무심한 탓이기도 하지만 사실 일부러 면회를 안 간 이유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지긋지긋한 곳이라는 게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있던 탓도 컸다.

저 세상으로 가신 나보다 연하였던 두 분은 퇴원도 못하고 중환자실을 오가다 끝내 운명을 한 것인데, 암 자체가 직접 원인은 아니고 못 먹어 체력이 달린데다 면역력이 약해져 감기로 인한 폐렴이 와서 그 걸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집에서 먹고 싶은 것 먹고 지내며 항암치료로 인해 몸이나 안 망가지게 하여 육 개월 이상은 고통 없이 더 살다 갈 수 있는 것을 말이다.

아이의 엄마는 들리는 소식 모두가 우울한 것들뿐이라 너무 절망스럽다고 했다. 나의 건강을 되찾은 모습을 보니 힘이 생긴다고도 했다. 통원 치료차 병원에 올 때 마다 병실에 좀 들려서 지금의 환한 웃음 띤 얼굴과 건강한 모습을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보여주어 희망을 갖게 해 주란다.

한 번은 쇼크로 인하여 열이 사십 도를 넘어 잠깐 의식을 잃고 처리실로 옮겨졌었다. 깨어나니 주위에 의사와 간호사 등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일곱 명이 침대를 둘러싸고 내려 보고 있었다. 죽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보구나. 저녁엔 회복하여 원래의 침대로 왔는데 회복했다고는 하나 기분이 그리 좋지를 않았던지 평소와 같은 얼굴 모습이 아니었나 보다. 매일 들려서 이 것 저 것 돌보아 주는 간호보조사 언니가 ‘내가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고 너무 섭섭하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환자 중에 유일하게 볼 때마다 웃어주는 사람이 나 뿐이라 더욱 “섭하다”고 했다. 고약스럽게 늙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자 마음을 굳세게 먹고 미소를 실천한 탓이라고나 할까?

전부 같은 백혈병 환자들만 격리되어 이식을 하거나 이식을 앞두고 있는 이식 무균 실에 갇혀 독한 항암제로 인해 몸에 있는 입과 코 안, 위, 대장 등의 모든 점막이 다 헐은 상태라  모든 환자들이 밤낮을 안 가리고 토하는 소리며 가래침 긁어내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도 등골이 오싹오싹할 지경이었다. 이런 고통에 어떤 환자의 얼굴이 그리 평온할 수가 있을 것인가? 힘들고 아프니 사소한 일에도 간호사들에게 큰소리 나오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을 안 보고 나의 고통도 끝이 나려면 끊임없이 자면서 시간을 빨리 가게 하는 것뿐이었다. 항암제는 백혈구, 적혈구와 혈소판 수치를 거의 제로 상태로 낮추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점차 수치가 오르니 세월만 가면 일단 퇴원은 보장되는 것이다.  잠은 배고픈 것도 잊게 하고 몸의 고통도 잊게 해주며 시간도 빨리 가게 해준다. 이십여 일씩 밥 한 톨 안 먹고 버티니 하루에 세 번 먹고 두 번 주사로 투여하는 제산제로도 위 쓰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다. 모두가 얼굴 찌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뿐이다. 혹시 나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더라도 죽을 때까지 웃음을 잃지 않던 사람이라는 평이라도 듣는 것이 나을 거 같았다? 자다가도 얼굴만 마주치면 웃어 주었다. 너무 힘들지 않을 때는 유머를 잃지 않으려 간호사들에게 희떠운 소리도 했다. 덕분에 퇴원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내가 해맑은 웃음으로 떴다고 운동 겸 나가서 다른 간호사들한테 얼굴 좀 보여주고 오라는 싫지 않은 소리도 듣곤 했다. 환갑이 넘은 사람한테 해맑다는 표현이 가당키나 하냐며 농담을 주고받던 그 격리실의 퇴원 후 꼭 들리라던 간호사들에게 다음 외래 진료차 갈 때  들려서 이렇게 멀쩡하게 잘 회복한 사람도 있다고 입원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올 참이다.

그렇다. 지금부터의 삶은 덤이다. 많은 사람이 왜 하필이면 나한테 이런 병이 생기느냐며 세상 원망을 한다는데 정말이지 나는 눈곱만큼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병이고 더구나 이 나이 되도록 하고 싶은 많은 일 원 없이 해보았으니 미련도 그리 없는 터이었다. 생로병사가 거스를 수 없는 세상사의 필연적인 이치일진대 미련을 가진다고 운명을 뒤바꿀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남은 인생 한국어 교사로 봉사하고 싶어 오늘도 여섯 시간 이상을 컴퓨터에 매달려 공부하다가 화면 바뀔 때마다 창에 뜨는 것이 성가셔 스토리텔링 공모전에 몇 줄 써서 응모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