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파의 사랑 / 우먼

관음사는 관음보살님을 모시는 작은 절이다. 관음사를 막 나오면 정자가 있다. 아파트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네 시경. 동네 할머니들의 놀이터로 안성맞춤이다. 마실 나온 할머니들이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다. 할머니 수만큼 쭈쭈바를 샀다. 쭈쭈바를 드리면서 “ 영강님이라고 생각허고 맛나게 드셔요!”
우리 일행의 능청맞은 말에 호호 할머니들의 틀니가 들썩거린다.

할머니 한 분이 그물눈을 만지고 있다.
“쭈쭈바 잡수고 하세요.”
“천성이 군것질을 안하는구먼요.”
“다른 할머니들은 다 노는데, 뭐 하러 그렇게 열심이래요.”
“죽으면 맨 날 쉴 것인디, 쪼매라도 힘 있을 때 해야지 놀먼 뭐허겄어요”
“자식들 없어요?”
“아들이 배 부리는디, 이것도 꽃게잡이 그물이구먼요. 터진 것은 띠어내고 성한 것은 이서서 다시 쓰는구먼요. 이렇게 하나 엮으면 삼만원인디, 심심찮게 돈벌이도 돼요. 아들 내외가 뭐가 필요 할까, 내가 뭘 도와줘야 하나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았구먼요. 긍께 아들내외는 우리엄니가 최고라고 지금까지는 말 허요.

노인들 일 안하고 놀먼 바로 불행이구먼요. 내 주위에서도 많이 봤구먼요, 주눅 들어 불쌍하게 사는 사람들은 편히 살려다보니 그렇게 된 거여. 내 며느리들은 효부지. 아직까진 시어밀 인정 허니께. 아들 때문에 속상한일 있으면 내가 시에미인데도 조잘조잘 다 일러요. 며느리편이 되어주면 불란(不亂) 일어날 일도 없고........ 동서 간에 흉을 보믄 그냥 다 들어 주고 입 꼭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지.”

“다른 집은 고부간 갈등이 심해 죽느니 사느니 헌다는데 할머니는, 참 지혜로우시네요. 비결이 따로 있나 봐요?”
“비결이랄 것이 뭐 있겄어. 나는 며느리 셋을 손주 날 때마다 해부간을 다 했줬구먼. 석 달 동안 꼬박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했어. 그러니 며느리들이 친정엄마보다 더 좋다고 혀요.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정을 듬뿍 주고 나믄, 반드시 똑같이 되돌아오는구먼요. 그라고 내도 시에미니께 미운 일 있으면 좀 참았다가 좀 더 늙어 들을 수 없을 때, 나 보는데서 말고 실컷 욕하라고 허는구먼요. 그러면 며늘애들이 피식 웃고 말지요.”

“할머닌 참 보살이네요”
“아이고 뭔 말은 그렇게 허신다요. 시상 살믄서 느낀 것 뿐인디.”
“할머닌 몇 살까지 살고 싶으세요?”
“나이 80, 이쪽저쪽 해서 죽어야 헛고생 아니구먼. 더 살믄 그때부터 헛고생이여! 인자 나도 얼마 안 남았어.”

쭈쭈바 하나 먹고 나서도 한참이나 정자 그늘 밑에서 할머니 사는 철학을 듣고 있자니 부처가 따로 없다. 속이 비어 가는 쭈쭈바를 붙잡은 할머니들의 손등에 저녁노을이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