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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焦土)의 시  

하꼬방 유리 딱지에 애새끼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체니(少女)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彼岸)을 저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 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 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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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및 성장

본명은 상준(常浚). 1919년 9월 16일 함경남도 원산 문천 출생. 
15세 때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수도원 부설 신학교에 입교(1934)하였다 
포기하고 환속(1937)한 뒤 도일하여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종교학과 졸업

1941)후 귀국하여 북선매일신문 기자(1942)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딤. 
문단에 등단하여 발표한 시들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 의해 
반사회주의적 작품으로 비판받아 반동 작가로 규정되자 
월남(1947)하여 이후, 연합신문 문화부장(1948~1950)으로 활동.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 주간(1950)을 맡은 시절 
6.25가 발발하자 종군작가단을 구성하여 부단장으로 취재 및 문단활동에 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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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여자대학교 부교수(1952~1956)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1953~1957)
경향신문 논설위원(1960~1965), 
가톨릭신문 논설위원(1966)
미국 하와이대학교 초청교수(1970~1973), 
중앙대학교 객원교수(1976~1997)
미국 하와이대학교 초청교수(1982)
문예진흥원 이사(1985년~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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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균, 김중업, 백선기, 이성범, 이한기, 정비석, 차주진. 회호진 등과 함께 
[회귀(回歸)] 동인을 결성하여 명예회장으로 범양사의 이성범을 선출(1985)
예술원 회원(시)(1990),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고문(1991) 역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김광균 등 많은 문인지우들을 가톨릭으로 
귀의시켰으며 

자녀는 소설가인 딸 자명(사위 김의규-성공회대학교 교수)이 있다.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되어 입원(2003. 9~), 병상에서 지내다 
영면(2004. 5.11 03:40, 향년 85세)

[한국문인] 2003년 10ㆍ11월호에 유언과 함께 시 오늘을 마지막으로 발표. 
안성시 천주교묘지에 묻힘





금성화랑무공훈장(1955)
서울시 문화상(1957)
국민훈장동백장(1970)
대한민국문학상(1980)
예술원상(1993)



♬Landfall / Mike Old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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