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꿈에는 하늘 가득 영롱하게 빛나는 별과 은하수를 보았다. 기분 좋은 꿈은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가는 기쁨이 될 수 있다. 날마다 흐리고 지척지척 비만 내리는 장마철이라 어쩌다 펼쳐지는 한 줄기 햇살에도, 혹은 후박나무 잎새로 살랑거리며 지나가는 맑은 바람결에도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항상 가까이 있을 때는 그 존재의 고마움을 잊고 지내다가도, 한동안 뜸하여 대할 수 없게 되면 새삼스레 그 은혜와 고마움을 실감한다. 밤하늘의 별과 달, 어둔 숲속에서 여기저기 어지럽게 날고 있는 반딧불을 대할 때도 그런 생각이 든다. 의기가 서로 통하는 친구 사이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무심히 피고 지는 꽃과 가지 끝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바위틈으로 흘러내리는 시냇물에서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사람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건 보이지 않건 혹은 귀에 들리거나 들리지 않거나,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생명들이 한데 어울려 우주적인 생명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존재와 조화는 따뜻한 사람의 눈으로 보아야만 찾아낼 수 있다. 한 생명의 뿌리에서 나누어진 지체라는 대등한 입장에서 보아야지, 사람 중심으로 보려거나 인간 우위의 눈으로 보려고 한다면 눈을 뜨고도 볼 수가 없다. 현대인의 맹목(盲目)은 바로 이 자기 중심 내지는 인간 중심의 오만에 그 까닭이 있을 것 같다.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지구 저쪽에서 일어난 일들이 우리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구경거리 같지만, 보다 맑은 눈으로 보면 몇 다리를 거쳐 곧 우리에게 이어진 일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질구레한 연유들은 그만두고라도 같은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결코 무연(無緣)한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요즘 우리 둘레에서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노사간의 갈등만 하더라도, 수평적인 인간관계로 대하지 않고 수직적인 주종(主從)관계로 다루려는 고식적인 태도에 문제의 뿌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수직적인 주종관계에는 이해(利害)와 대립과 투쟁이 늘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난 수평적인 대등한 인간관계는 이해(理解)와 협조와 양보로 공동운명체 의식을 갖게 된다. 그러기 우해서는 최소한 기본적인 생계비는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와 현상은 서로가 의지하고 관계 지어진 필요조건들인 것. 개인이나 국갈ㄹ 물을 것 없이 함께 잘살려고 해야지 한쪽만 잘살려고 한다면, 그 누구도 그 어떤 나라도 잘살 수 없다. 잘사는 데는 물질적인 충족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족도 문제 삼아야 한다.

    한걸음 나아가 뭣보다도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보다 값있게 살줄을 알아야 한다. 가치 부여를 할 수 없는 삶은 단지 생존일 뿐. 생존에만 급급한 나머지 생황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많이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산다할지라도 마음이 넉넉하지 못하면 값있는 인생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가진 것은 적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최선을 다해서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당당한 인생을 이룰 수 있다.

    저마다 부자가 되려고 하는 오늘 같은 물질만능의 세태에서는, 차라리 가난의 덕을 배우는 것이 슬기로운 일이 아닐까 싶다. 마음이 가난해야 복이 있다고 했으니까. 마음이 가난해야 온갖 갈등과 모순에서 깨어날 수 있을 테니까. 마음이 가난해야 거기 우주의 메아리가 울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마음이 가난해야 비로소 삶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다.

    지금 밖에서는 갑자기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다. 도 큰비가 쏟아질 모양인가. 아궁이에서 물을 퍼내야 할 걸 생각하니 성가시다.

    천둥 번개가 치니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다. 지난 4월 하순 목포의 향토문화관에서 보았던 일이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고 천둥 번개가 번쩍번쩍 귀와 눈을 어지럽히더니. 유달산 쪽에서부터 부옇게 소나기가 몰아오는 것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향토문화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갓바위라는 명소가 있는데, 거기 소풍 왔던 국민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은 굵은 빗발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자 모두가 비를 피해 뿔뿔이 흩어져 뛰었다. 더러는 버스를 타고 혹은 트럭 위에 실려서, 그리고 어떤 꼬마들은 인솔교사의 뒤를 따라 패잔병들처럼 달아났다. 그야말로 일대 혼란을 이루었다.

    이런 광경을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면서 지리멸렬(支離滅裂)이란 낱말이 떠올랐다. 갈가리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한 상태.

    그대 한 무리의 꼬마들이 선생님을 따라 향토문화관으로 들어왔다. 인솔교사가 단체로 표를 ㅡ사가지고 줄을 지어 2층 수석전시실을 관람시키었다. 이윽고 3층으로 올라와 소치(小痴) 삼대와 그들의 그림에 대해서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머물러 있는 바로 이웃 소품 수석 전시실에 아이들을 앉히고 타일렀다. 이웃 방에는 다른 손님들도 있으니 조용히 하라면서 싸가지고 온 것들을 먹게 하였다.

    비에 쫓겨 뿔뿔이 흩어져 달아난 바람에 도시락을 준비해온 학부모들도 달아나 버렸는지 빈손으로 들어온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곁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옛날에 콩 한 조각을 가지고도 몇이서 나누어 먹었다는 고사를 들추면서 서로들 나누어 먹으라는 선생님의 말씀.

    한소나기 지나더니 푸른 하늘이 열리었다. 아이들은 우리가 있는 방을 구경하기 위해 부을 지어 조용조용 지나갔다. 가슴에 붙은 이름표를 보니 6학년 6반이었다. 어디 학교냐고 묻자 수줍어하면서 삼학국민학교라고 했다. 여학생에 비해 남학생들의 체구가 작은 편이었는데 하나같이 말끔 말끔 귀여운 얼굴들이었다.

    그 애들은 밖으로 나가 줄을 서더니 맑게 갠 하늘 아래서 힘차게 노래를 부르면서 시내 쪽으로 걸어갔다. 이런 광경이 그날의 내게는 커다란 감동이었다. ‘좋은 선생님’이란 바로 그런 지혜롭고 살뜰한 선생님일 거라고 생각이 모아졌다.

    비에 쫓겨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판국에 오직 그 반의 교사만은 당황하지 않고, 비도 피하고 자기네 고장에 어떤 문화유산이 있는가를 현장에서 가르치는 지혜를 보였던 것이다. 교육은 그 같은 지혜와 사랑과 인내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의 교육이 지식과 기능에만 눈을 팔기 때문에 사람이 멍들고 있지 않은가.

    그게 어디 교육만이겠는가. 정치건 경제건 노사간의 갈등까지도 지혜와 사랑과 끝없는 인내를 가지고 함께 노력할 때 막혔던 벽이 무너지고 길이 뚫릴 수 있을 것이다. 인간끼리 나누는 대화도 그저 주고받는 말이 아니라, 지혜화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맞은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열린사회란 그 같은 대화가 활발한 사회이고, 막힌 사회란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만 있지 대화가 끊어진 사회. 오늘 우리는 어떤 사회에 몸담고 있는가.

(85. 8)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