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 석가모니는 그의 생애를 통해 두 가지 큰 공양(供養)을 받았다고 제자들에게 말한다. 80평생을 사는 동안 수없이 많은 공양을 받았을 텐데, 그중에서도 두 가지 공양이 큰 비중을 갖는 것은 그만큼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것은 그가 정각(正覺)을 이루기 위해 6년 동안 결사적인 고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문득,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보다는 체력을 선용(善用)함으로써 수행의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선 쇠약해진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단식을 그만두고 음식을 먹기로 한다.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몸을 씻고 나와 처음으로 받은 공양이 소녀 수자타가 올린 우유죽이었다. 이 우유죽을 먹고 기운을 회복한다. 나중에 받은 것은 앓는 몸으로 열반의 땅인 쿠쉬나가라를 향해 길을 갈 때 파바의 거리에서 금세공(金細工) 춘다로부터 받은 공양이다. 부처님은 이 공양을 빌미로 식중독을 일으킨다. 춘다가 어쩔 바를 몰라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생애에 있어서 최후의 공양이 될 거라고 하면서 그 공양의 공덕을 칭찬하여 춘다를 위로한다.

   지난겨울 불타의 전기(傳記)를 번역하면서 이 2대 공양을 보고, 나는 지금까지 내 자신이 받은 공양에 대해서 생각을 더듬어보았다. 여기저기서, 고맙고 은혜로운 여러 가지 공양을 적잖이 받아왔지만, 선뜻 떠오르는 최대의 공양은 재작년 여름 명동 성당에서 받은 음악 공양이었다. 그 사연은 이렇다.

   성(聖) 바오로 수도회에서 그해 여름 종신 서원(終身誓願)할 수녀님들이 모여 피정 중이었는데, 그분들이 선(禪)에 대한 이론과 실습을 요청해 와서 한 주일 동안 다니면서 피정에 동참하게 되었다. 친절하게도 아침 여덟 시면 차를 보내오고 오후 네 시 반쯤 되면 태워다주었다.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신부님과 함께 먹었는데 내 담백한 식성을 알아 마음써주곤 했었다.

   그때 마침 우리 다래헌에는 수련(垂蓮)이 한창 문을 열 때라 수녀님들은 번갈아가면서 연꽃을 보러 왔었다. 마지막 날에는 수련장과 관구장 수녀님도 빗속에 다녀갔었다. 그러니 우리 절과 성 바오로 수도회는 마치 자매결연이라도 맺은 것 같았다. 물위에 핀 연꽃처럼 맑고 청초한 자매(姉妹)들 사이에서 함께 피정을 하면서 느낀 것은, 비록 종파는 다를지라도 이 시대 이 지역에서 뜻을 같이하고 있다는 수행자로서의 긍지와 감사였다.

   그런 어느 날 점심 뒤 나는 성당으로 안내되었다. 구불구불한 층계를 딛고 2층으로 따라 올라갔다. 거기 커다란 파이프 오르간이 장치되어 있었다. 지나가는 말로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한번 들어봤으면 했더니 수녀님들이 마음에 담았다가 이날 내 소원을 풀어준 것이다. 텅 빈 성당 안에서, 그것도 이교도인 나 하나를 위해 연주를 해 준 것이다.

   웅장한 파이프 소리. 아, 그것은 감동을 넘어선 전율(戰慄)이었다. 사변적인 이론을 떨어버리고 음향으로 표현한 종교 그것이었다. 그 앞에서는 온갖 분별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여름철 한낮의 더위도 미치지 못했다.

   그날 한 수녀님이 내게 들려준 파이프 오르간의 그 장엄한 음악은 이따금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내 귓속의 귀에 들린다. 그대의 음악은 내 생애에서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최대의 공양이 될 것이다.
 

<1975 . 7>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