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를 빌려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언제 우표 값이 110원으로 올랐는지도 모른 채 지낼 만큼 그동안 편지와는 인연이 멀었습니다. 우편배달의 발길이 닳지 않는 그런 곳이라 띄울 일도 받을 일도 없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이 있지만 소식을 주고받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세계 안에서 그때그때의 소식을 만들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어떤 편지든지 받는 그 순간의 감흥이 식어버리면 답장할 일이 별로 없게 됩니다.

   지난 4월 하순부터 일에 묻혀 줄곧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내일까지 더 일을 하고 나서는 우선멈춤을 하려고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내가 이 오두막에 몸을 기댄 지 어느덧 한 해가 됐습니다. 어떤 인연에서였건 간에 나를 받아준 이 산천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무를 심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백리 밖에 있는 산림조합에 가서 묘목을 사다가 오두막 둘레의 묵은 밭에 심었습니다. 전나무 230그루, 가문비나무 30그루, 자작나무 100그루, 그리고 모란 50그루. 나무를 심고 나서 몇 차례 내린 비로 묘목들은 건강하게 새로운 움을 틔우고 잎을 펼쳐 내고 있습니다.

   내가 개인의 소 유지도 아닌 이 산중에 나무를 심은 것은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닙니다. 나무를 심는 그 일 자체가 즐겁고 좋은 일 같아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일찍이 선인들이 심어서 가꾸어놓은 나무와 숲의 혜택을 고맙게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땅히 선인들의 뜻을 이어서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작나무의 아름다움을 나는 이곳에 와서 비로소 발견했습니다. 한겨울 눈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서 잇는 모습도 좋지만, 희끗희끗한 그 줄기며 새로 피어나는 작고 여린 이파리가 바람에 팔랑거리는 모습은 아주 사랑스럽습니다. 대관령에는 방풍림으로 빽빽이 자라고 있는 전나무 숲 외곽으로 울타리삼아 키가 큰 자작나무들이 늘어서 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빛과 형태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요즘 영동고속도로 연변에는 연둣빛 잎을 펼쳐내고 있는 자작나무의 아름다움을 눈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목격할 수 있습니다.

   전나무는 뭣보다도 쭉쭉 뻗어 올라가는 그 청청한 기상이 마음에 듭니다. 영동지방에 잘 어울리는 나무이지요. 얼핏 보면 전나무와 비슷하게 보이는 가문비나무는 전나무의 기상에는 못 미치지만 그런대로 깔끔한 나무입니다. 묘포장에 가서 보고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구해다 심었습니다.

   이번에 방구들장을 죄다 뜯어 새로 놓았습니다. 당초 이 오두막의 아궁이는 마룻방에 있는 마룻장을 열어젖히고 무릎 꿇고 엎드려 땔감을 넣어야 하는 아주 불편한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개울가이면서도 높은 지대라 회오리바람이 잦아 불이 잘 들이지 않습니다. 군불을 지피다가 불이 내어 연기에 쏘인 끝에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나는 이처럼 아궁이를 잘못 만들어 놓은 알지 못하는 녀석한테 욕지거리를 퍼부어야 했습니다. 이 오두막에 온 후로 내 입이 걸이진 것도 형편없는 아궁이의 구조와 난폭하고 뻔뻔스런 운전자들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소문 끝에 멀리 타지에 있는 방 잘 놓는다는 노인을 불러다 아궁이를 밖으로 내고 굴뚝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더니 이제는 잘 들이게 되었습니다. 방을 뜯어 고치는 바람에 문지방도 사니 높게 올려 달았습니다. 이 오두막에 들어온 이래 낮은 문지방 때문에 헤아릴 수도 없이 머리를 들이받아 번번이 상처를 입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수그리지 않고 어깨를 펴고 방안에 드나들 수가 있습니다.

   20이 밖에서 목수를 불러다 일을 시켰는데 제대로 배운 솜씨가 아니어서, 어느 것 하나 바르게 해내지 못했습니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해 일의 진척이 더디기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씨가 착한 그를 나무랄 수도 미워할 수도 없어 그때마다 우스갯소리로 그의 등을 도닥거려주어야 했습니다.

   일 끝에 제목이 조금 남아 뒤꼍 산매화나무 아래 조그만 정자를 하나 세워놓았습니다. 말이 정자지 뒷마루를 뜯어놓은 마룻장에 네 기둥을 세우고 싸릿대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원두막 같은 건조물입니다. 그렇지만 정자의 이름만은 산매정(山梅亭)이라고 그럴듯하게 지어두었습니다.

   요즘 뒤꼍에서는 여남은 그루나 되는 산매화가 이 가지 저 가지에서 허옇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누가 언제 이곳에 심어놓았는지 해묵은 고목들인데, 지난겨울 눈 때문에 가지가 많이 꺾이고 더러는 줄기도 부러졌습니다. 꽃모양은 매화와 흡사하고 향기도 매화 향기와 비슷합니다. 가지가 죽죽 뻗지 않고 꽃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매화와 다를 뿐입니다. 열매도 보통 매실보다 훨씬 굵게 열립니다. 이와 같은 산매화가 피어 있는 꽃가지 아래 잇는 정자이기 때문에 선뜻 산매정이란 이름이 떠오른 것입니다.

   요즘 이 산중에는 여기저기에서 돌배나무가 하얗게 꽃을 피워 볼만합니다. 이 고장에서는 신배나무라고도 하는데, 배꽃보다 훨씬 많은 꽃을 피웁니다. 멀리서 보면 이팝나무로 착각할 만큼 나무 전체가 하얀 꽃으로 뒤덮입니다. 그리고 산자락과 밭 기슭에 조팝나무도 한참 꽃을 피우는 계절입니다. 이팝나무며 조팝나무 혹은 밥태기나무와 같은 이름은 농경사회에서 나옴직한 명칭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려고 산중의 오두막에 집 단장을 하느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나는 그 일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다른 목적을 두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살다가 내일 떠날지라도 오늘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삶은 영원한 현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 놓여 있건 간에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리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집고치는 일을 하면서 그 사람이 지닌 여러 가지 측면을 헤아릴 수 있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그 자신 안에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거듭거듭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덕을 지닌 성실한 사람인지, 이해타산에 밝은 이기적인 인간인지, 혹은 기능과 지능은 모자랄 지라도 선량한 심성을 지닌 사람인지를 하는 일을 통해 이내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젊은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고 열심히 일을 해주어 큰 감동과 함께 신뢰와 친화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좁고 경사진 산길에 다닐 수 있는 세레스(소형 짐차)를 몰로 와 수시로 자재를 날라다주면서 시원시원하게 일을 치러 나갔고, 또 한 젊은이는 경운기로 무거운 돌과 저 아래 시냇가에서 힘들게 모래를 파 나르면서도 늘 미소와 활기로 넘쳐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의 중심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사랑과 이해는 사람의 중심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진실은 말없이 묵묵히 일하는 그 속에서 꽃피어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이웃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전력을 기울여 전체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분적이거나 어중간한 것은 사람을 따로따로 분리시킵니다. 분리는 궁극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내 거처를 궁금히 여기면서 찾아 나서고 싶다는 친지들의 말을 더러 듣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말을 해줍니다. 만약 내 오두막이, 내 삶의 보금자리가 불행히도 친지들에게 노출되면, 그날로 나는 짐을 싸 보다 깊숙한 데로 떠나갈 것이라고 솔직한 심경을 토로합니다. 번거로운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있고 싶어 하는 괴팍한 사람은 홀로 있도록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그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일에 밀려 운상선원에서 보내온 지리산의 햇차도 아직 시음을 못했습니다. 해마다 거르지 않고 보내주는 현묵 스님의 차 향기 같은 마음씨 앞에 고마움과 함께 이 사연을 띄웁니다.
 
1993. 6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