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에 별고들 없는지. 해마다 치르는 계절적인 일이지만 겪을 때마다 새롭게 여겨지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겪는 현재의 삶이 그만큼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개울물이 줄어들만하면 다시 비가 내려 그 자리를 채워주고, 넘치게 되면 날이 들어 스스로 조절한다. 이것이 자연의 리듬이고 질서인 듯싶다.

   이와 같은 리듬과 질서는 우리들의 삶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모자라면 채우기 위해 기를 쓰며 뛰게 되고, 가득 차면 넘쳐서 자신의 그릇만큼만 지니게 된다. 그 이상의 것은 과욕이며 남의 몫인 줄 알아야 한다.

   산중에서 혼자서 오래 살다보면 청각이 아주 예민해진다. 바람소리나 개울물소리 새소리만이 아니라, 숲속으로 지나가는 짐승의 발자국 소리며 벌이 붕붕거리는 소리, 곤충이 창호에 부딪치거나 기어 다니는 소리, 꽃이 피어나는 소리, 한밤에 무리지어 날아가는 기러기의 날갯짓 소리까지도 낱낱이 잡힌다.

   자신을 에워싼 외부세계를 먼저 청각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다가 날카롭거나 귀에 선 소리에는 동물적인 방어본능이 발동한다.

   산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가장 역겨운 소리는 마을에서 주인을 따라 올라온 개가 짖을 때, 경운기가 딸딸거리며 고갯길을 올라올 때, 그리고 전투기가 느닷없이 찢어지는 굉음을 내며 저공비행을 할 때 등이다.

   요즘 이곳 산골에서는 감자꽃과 싸리꽃이 한창이다. 감자꽃의 아름다움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 고장에 와 살면서 그 아름다움을 비로소 알았다. 남녘에서도 감자꽃을 본 적은 있지만 스치고 지나쳤다. 대단위로 경작하는 이 고장에서 드넓은 밭에 가득 감자꽃이 피어나면 아주 볼만하다.

   연한 보랏빛에 노란 꽃술을 머금고 있는 그 올망졸망한 꽃도 귀엽지만 은은한 꽃향기도 여느 꽃에 못지않다. 오두막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드넓은 감자밭이 있는데, 나는 요즘 밭머리에 서서 한참씩 귀여운 그 꽃에 눈을 씻고 그 향기로 숨길을 맑히곤 한다. 감자를 먹을거리로만 여겼는데 꽃의 아름다움을 보고 나서는 고마운 농작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컵에 한 송이 꽃아 식탁 위에 두고 끼니 때문 마주하는 잔잔한 즐거움이 있다.

   ‘호박꽃도 꽃이냐?’라는 말이 있는데, 어째서 호박꽃은 꽃이 아니란 말인가. 얼마 전에 길을 가다가 한밭 그득히 호박꽃이 피어 있는 걸 보고 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 이슬을 머금은 진초록 잎에 노란 꽃이 환하게 피어 있는 호박꽃은 우리 시 골에 어울리는 순박한 꽃임을 실감했다.

   해질녘에 피는 박꽃의 가녀림에 비해 호박꽃은 아주 건강한 꽃이다. 둘 다 겸손한 꽃이라서 눈부신 햇볕 아래서는 그 아름다움을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그러니 호박꽃을 제대로 보려면 이슬이 걷히기 전에 보아야 한다.

   우리는 굳어진 고정관념 때문에 기왕에 알려진 것만을 받아들일 뿐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부족하다.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맑은 눈으로 찬찬히 살펴보면 아름다운 생명의 신비가 바로 우리 곁에 수없이 깔려 있다.

   싸리꽃만 하더라도 산골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피어 있어 지나치기 일쑤인데,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살며보면 홍자색을 띠어 좀 쓸쓸하게 보이는 꽃에 가을의 입김이 배어 있다. 싸리비로 마당을 쓸 때 그 가지에 달렸을 꽃을 생각한다면 뜰에 싸리꽃 향기가 번지지 않을까 싶다.

   책은 그 읽는 시기와 장소에 따라 감흥이 아주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책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뭣보다도 중요하다. 소로우는 그의 <윌든>에서 말한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우리의 지적 능력을 잠재우는 독서이며 따라서 참다운 독서라고 할 수 없다.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진정한 독서다.’

   불일암에서 몇 장 들추어보다가 시들하게 여겨져 그만둔 책을 이곳 오두막에서 다시 펼쳐보고 커다란 감동을 받는 일이 더러 있다. 나까무라 고오지의 <청빈의 사상>에서 그 청빈한 삶을 극구 찬양한 양관화상(1758 ~ 1831)이 있는데, 그 스님이 써놓은 시가(詩歌)를 중심으로 엮은 일화집으로 <양관 이야기(良寬物語)>가 있다.

   그가 한 산중의 보잘것없는 초암(草庵)인 오홉암에서 지낼 때다. 오홉암이란 하루 다섯 홉씩 한 사람이 겨우 살아갈 만한 식량을 본사에서 대준 데서 온 이름이다. 그러나 양관이 이곳에서 지낼 때는 그 다섯 홉의 식량마저 공급이 끊겨 손수 마을에 내려가 탁발을 해다가 근근이 연명을 해야만 했다.

   이런 가난한 암자에 하루는 도둑이 들었다. 낮에는 깔고 앉아 좌선을 하고 이불이 없어 밤에는 덮고 자는데, 도둑은 그 방석을 훔쳐가려고 했다. 스님을 도둑인 줄 알면서도 그가 놀랄까봐 모로 돌아누워 그 방석을 손쉽게 가져가도록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나온 어느 날 한 사나이가 이불 짐을 메고 스님을 찾아온다. 사나이는 몇 해 전 가난한 암자에서 방석을 훔쳐간 도둑이 바로 자신이라고 하면서 용서를 빈다.

   그때 그는 스님이 일부러 자는 척하면서 방석을 손쉽게 가져가도록 한 사실을 알고 더욱 가책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분이 어떤 스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불 대신 몸에 두른 방석을 훔쳐온 자신을 두고두고 자책하면서 몇 해를 두고 벼르다가 아내와 의논하고 이불을 한 채 만들어 왔단다. 그의 청빈과 너그러움이 말없는 가운데서 도둑을 감화시킨 것이다.
 
욕심이 없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구하는 바 있으면 만사가 궁하다
담백한 나물밥으로 주림을 달래고
누더기로써 겨우 몸을 가린다
홀로 살면서 노루 사슴으로 벗하고
아이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논다
바위 아래 샘물로 귀를 씻고
산마루의 소나무로 뜻을 삼는다

   양관의 시다. 수행이란 말은 곧 세속적인 욕망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욕망이 없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사는 것을 뜻한다. 수행자는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는 완전히 그것에 몰입한다. 아무것도 그의 뒤에 남겨두지 않는다. 그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먹고 있을 때는 먹는 행위 그 자체가 된다. 일을 할 때도 또한 일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그는 정신적으로는 누구보다도 풍요롭게 살며, 그의 삶은 활력의 원천이기도 한다.

   양관은 32세 때 스승에게서 깨달음의 인정을 받은 후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퇴락한 빈 암자만으로 골라가면서 살아간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73년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가 원통사라는 절에서 스승을 모시고 수행 중일 때 그 절에서 30년을 두고 묵묵히 일만 하는 한 스님을 보고 큰 감화를 받는다. 그는 다른 스님들처럼 참선도 하지 않고 경전도 읽지 않고 오로지 밥 짓는 일과 밭일만을 할 뿐이다. 묻는 말에나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그는 아침이면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물을 긷고 밥을 지으며 자신이 가꾼 채소로 맛있는 찬을 만들고 국을 끓인다.

   대중이 선실에 들어가 참선할 때 그는 혼자서 넓은 식당과 주방을 깨끗이 쓸고 닦는다. 남들이 싫어하는 변소청소도 자신이 맡아서 한다. 그리고 잠시 틈이 나면 밭가에서건 공양간에서건 그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 뿐 결코 허리를 바닥에 대고 눕는 일이 없었다.

   바보처럼 여기던 양관도 뒷날 그가 진정한 수행자였음을 알아차리고 그의 덕을 기린다. 양관의 의식 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늘 어른거렸을 법하다.

   한 사람의 인간 형성에는 이렇듯 이름 없는 조연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 조연자는 주연자의 삶을 통해서 거듭 꽃피어난다.

   당신은 조연인가 주연인가.
 
1993. 8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