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에는 칠월 보름 백중달이 하도 좋아 몇 차례 자다 깨다했다. 창문으로 스며들어온 달빛이 내 얼굴을 쓰다듬는 바람에 자다 말고 깨어나곤 했었다. 창문을 여니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에 맷방석만한 보름달이 휘영청 떠서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슬이 내려앉은 전나무와 해바라기 잎에도 달빛이 반짝거렸다.

   칠월 보름은 승가의 여름철 안거(安居)가 끝나는 해제일(解制日). 이날 나는 경상남도 통영의 미륵산 미래사에서 중이 되었다. 이날이 오면 출가 수행자의 나이가 하나 더 보태진다. 해놓은 일도 없이 연륜만 쌓여진다는 자책이 따른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세월을 덧없이 흘려보내고 있다는 말이 더 적절한 듯싶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밤낮없이 흘러가는 저 개울물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으면, 아하 저게 바로 세월이 지나가는 소리로구나 하고 되새기게 된다.

   설렁설렁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뒤꼍에서는 뚝뚝 산자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그 소리에 처음에는 움찔 놀라곤 했었다. 이 고장에서는 이 열매를 ‘꽤’라고 부르는데 어디서 유래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열매의 크기는 보통 자두보다 작지만 맛은 자두와 흡사하다.

   제7호 태풍 로빈에 실려 온 폭우로 통나무다리가 떠내려가고 온 골짝이 할퀴어지고 나자 심란해서 밖에 나가 며칠 동안 어정거리다 돌아왔다. 그새 산자두가 수북이 떨어져 반쯤 삭아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나무에서는 연방 우수수 열매가 떨어졌다. 처음에는 주워 먹다가 이내 물려서 성한 것만을 골라두었는데 그야말로 처치곤란이다. 다른 일로 뒤꼍에 갔다가도 풀섶에 새알처럼 소복이 떨어져 있는 걸 보면 참으로 오지다.

   이렇듯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무상으로 끊임없이 베풀고 있다. 봄에는 꽃과 향기로 우리 눈과 숨길을 맑게 해주고, 가을이면 열매로써 먹을거리를 선물한다. 우리가 자연에게 덕을 입힌 일이 무엇인가. 덕은 고사하고 허물고 더럽히고 빼앗기만 했을 뿐인데, 그 자연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말없이 나누어주고 있다. 이런 자연 앞에서, 이 영원한 모성(母性) 앞에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되돌아보고 돌이킴이 없다면 우리는 대지의 자식이 될 수 없다.

   자연의 은혜를 모른 채 파괴만 일삼는다면 인간은 그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우주의 망나니가 되고 말 것이다.

   모든 계절의 시작이 다 그렇지만, 유달리 가을은 설렁설렁한 글 바람 곁에서 예감된다. 나는 어제도 몇 차례인지 ‘가을바람이 불어오네!’라고 골짝에 메아리가 울리도록 큰소리를 질렀다. 가을은 귀가 예민해지는 계절. 맑은 대기 때문에 먼데 소리도 가까이 들린다. 풀벌레 소리며 짐승이 풀섶으로 버석버석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도 방안에서 들을 수 있다. 다람쥐가 뽀르르 달려가는 모습도 그 고시를 통해 헤아릴 수 있다. 지금 막 뒷골에서 노루 우는 소리가 난다. 노루도 가을바람을 타는가.

   바깥 마루 들보에 매달아놓은 쇠막대 풍경(Woodstock Chimes)이 설렁거리는 바람결에 부드럽고 아름다운 가락을 보내오고 있다. 처마 끝에 달아놓은 재래식 우리 풍경 소리는 좀 단조로운데, 일곱 개의 길고 짧은 알루미늄 파이프에 나무로 된 추가 바람결에 흔들려 내는 소리는 아주 음악적이다. 캘리포니아의 싼 페드로에 사는 친구가 얼마 전에 보내준 것인데, 이 풍경소리를 듣고 있으면 명상적인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내가 처음 이 풍경 소리를 들은 것은 태평양 연안 썬셋 거리에 있는 ‘요가난다 센터’에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법회나 강연이 끝나면 그 자리를 즉시 떠나버린다. 모임 끝에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진이 빠져 피곤하고 따분해진다. 그리고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쏟아버리고 나면 텅 빈 항아리처럼 말할 수 없이 허전하다. 군중으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어진다.

   몇 해 전 캘리포니아에서 한겨울을 지내는 동안 법회 끝에 혼자이고 싶을 때면 훌쩍 찾아간 곳이 요가난다 센터였다. 차량의 통행이 많은 썬셋 거리에서 일단 문안으로 들어서면 그곳은 조용하고 그윽한 별천지다. 꽤 넓은 인공호수 둘레로 띄엄띄엄 야자수가 서 있고 화초와 수목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동산. 나무 아래 앉아서 명상할 수 있는 의자가 여기저기 놓여 있다. 의자에 좌정하고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금세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때 어디선지 아주 감미로운 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그 풍경 소리다.

   은은히 울리는 이 풍경 소리는 자칫 졸리거나 무료해서 가라앉기 쉬운 명상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소리가 아주 음악적이기 때문에 무심히 귀를 기울이는 일 자체가 즐거운 명상이 된다.

   그곳 물레방앗간처럼 생긴 집에서는 아무나 들어가 의자에 앉아 명상을 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는데. 거기에서도 은은한 명상음악이 있어 명상의 즐거움을 거들어주고 있다.

   우리 나라에도 일반인을 위한 이런 명상의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아름답고 은은한 소리는 명상을 보다 풍요롭게 한다. 그저 아무 소리도 들으려 하지 않고 긴장한 채 꼿꼿이 앉아만 있게 되면, 명상 자체가 메마르고 공허해져서 피로가 빨리 오고, 타성적이고 관념적인 나머지 무기력에 빠지기 쉽다.

   명상은 깨어 있는 존재의 꽃이다. 명상은 어떤 종파의 전유물이 될 수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명상을 통해 자신을 마음껏 꽃피울 수 있다.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도 자연의 섭리 같지만, 그 안에는 홀로 겪는 명상의 세계가 있어 생명의 신비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조용히 안팎으로 지켜보라. 지켜보는 이 일이 곧 명상이다.

   명상의 스승은 말한다.

   “홀로 명상하라. 모든 것을 일단 놓아버리라. 이미 있었는지를 기억하려 들지 말라. 굳이 기억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죽어 있는 것이 되리라. 그리고 기억에 매달리면 다시는 홀로일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저 끝없는 고독, 저 사랑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토록 순결하고 그토록 새롭게 명상하라. 그러면 시들지 않는 천복이 있으리라.”

   우리는 바깥일에만 팔려 자기 자신을 안으로 들여다 볼 줄을 모른다. 우리 시대는 나라 안팎을 가릴 것 없이 온통 경제 타령만 하면서 사람의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 사람으로서 삶의 최고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인가는 저마다 처지와 소망이 다르기 때문에 한결같을 수 없다. 하지만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살건 간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가을바람에 곡식과 과수의 열매가 익어가고 또 떨어지듯이, 우리들의 삶도 또한 익어가고 떨어질 것이다. 가을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 귀로 자기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을은 명상하기에 가장 적합한 계절이다.

   관세음(觀世音)이란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 즉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임이다. 바깥 소리가 자기 내면의 소리와 하나가 되도록 지극하게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마침내 귀가 활짝 열린다. 이를 불교용어로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고 한다.

   송강 정철의 시조에 이런 것이 있다. 이 가을에 내가 가끔 읊고 있다.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 데 물어보자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며
돌아 아니보고 가노매라.

아 가을바람이 불어오네.

1993. 10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