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이 설 자리는 허공이 아니라 대지이다. 설 자리를 찾지 못한 나무들은 오늘도 회색의 거리에서 시들시들 헤매고 있다.

   봄철이 되면 화사한 화초의 뒤를 이어 정원수들이 수레에 실려 혹은 지게에 얹혀 길목에 늘어서 있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물론 이와 같은 나무들은 팔려가기 위해서 뽑혀 나온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나무들이다.

   정상적인 이식의 시기는 새싹이 돋아나기 전의 봄철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른 나뭇가지를 꽂아 놓아도 움이 튼다는 그래서 죽은 땅에서도 라일락이 핀다는 그러한 계절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봄철이 가고 여름으로 접어든 요즘에도 많은 나무는 티끌과 소음의 거리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서성거리고 있다. 흙을 벗어난 나무들의 표정은 쓸쓸하다. 지게에 실린 채 파리한 꽃들을 피우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그지없이 애처롭다. 고향을 떠난 지 오래인 나그네의 얼굴에서처럼 가지 끝에는 피로와 어두운 우수가 깃들어 있다. 상상력이 어지간한 가슴이라면 해가 설핏한 무렵 나무들의 나지막한 호소를 들을 수도 있으리라.

   "내가 설 땅은 어디지요?"

   해마다 봄이 되면 출가할 뜻을 지니고 산사를 찾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우리 해인사의 경우만 하더라도 하루에 두세 꼴은 능히 되리라.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그 수는 늘어갔다. 대개는 재학 중인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생동하는 세상을 살아보기도 전에 미리 기권하려는 것이다. 그들의 팔팔한 영혼이 호흡하기엔 너무나 살벌하고 흐린 세상인가.

  ​ 물론 대개 그들의 단순한 생각을 꺾어 돌려보낸다. 간절한 구도에서 찾아온 사람도 없지 않지만, 흔히들 구도의 길을 로맨틱하게 혹은 안이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돌려보낼 때의 마음은 결코 가벼울 수가 없다. 인생으로서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해 평생을 일상적인 범속에 묻혀 흘려버린 생애도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창 싱싱하게 생의 환희를 누려야 할 젊은이들이 정착할 바를 모르고 산문을 찾아 든다는 것도 분명히 슬픈 일이다.

  ​ 연중행사처럼 봄이면 젊은이들이 정치의 가도로 몰려나와 열기를 내뿜는다. 그런데 그 요인이 정치의 빈곤에만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 지향할 길을 열어주지 못한 무력한 오늘의 기성 층에는 그 허물이 없단 말인가.

  ​ 우리가 모두 어서어서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그래서 알찬 열매를 맺어야 할 바쁜 계절 앞에 설 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 나무들은 오늘도 소음의 거리에서 시들시들 헤매고 있다.

1965. 5. 2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