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 얼굴 볼 시간이 부쩍 줄어들었습니다. 공부는 잘되는지, 혹시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건 아니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미래에 하고 싶은 분야는 정했는지, 그런 걸 은근히 묻고 싶어도 도무지 아들과 마주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럴 시간이 간신히 생기면 아들은 늘 공부하거나 시험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죠.

   가장 아름다운 나이를 책상과 의자에 갇혀 보내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아들 손목을 붙잡고 어디로든 떠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 같았으면 하루쯤 가출도 했을 텐데 아들은 모범생 아내를 닮았는지 책상 앞에 딱 붙어 앉아 공부만 했습니다.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죠.

   오늘도 아들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학원에 갔다가 자정이 넘어야 집에 올 거라고 했습니다.

   그는 비어 있는 아들 방의 문을 열어봅니다.

   그가 고등학교 시절에 그랬듯이 책상 서랍 하나는 굳게 잠겨 있었고 책상 위는 좀 어질러져 있었습니다. 다른 곳은 청소해도 책상 위는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에 아내도 아들의 책상은 내버려두었습니다.

   아들의 책상을 바라보다가 그는 책갈피에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는 메모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거기에 이런 글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김 포장지 속의 방습제
파슬리
비가 오지 않는 날의 우산
관광지에서 사 온 열쇠고리 


   암호를 푸는 탐정처럼 그는 다시 한번 아들이 써놓은 것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없어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것, 있으나 마나 한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공통점이 보였죠. 아들은 그런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처음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메모가, 아들이 자신의 청춘을 찾아가기 위해 그린 일종의 약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생하게 비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이렇게 스스로에 대해 생각이 많다면, 그저 멀리서 잘 지켜봐 주는 일이 최선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빨간 사인펜을 찾아 들고 아들이 남긴 메모 아래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김 포장지 속의 방습제 – 인생을 눅눅하지 않게 하는 기특한 녀석.
파슬리 – 훌륭한 세프들은 반드시 챙기는 것.
비가 오지 않는 날의 우산 –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챙겨두어야 비오는 날 쓸 수 있는 소중한 존재.
관광지의 열쇠고리 – 그것이 멋진 것이라면 가까운 친구가 되고,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추억이 되는 것. 


   빨간 펜으로 남겨놓은 글자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글출처 : 저녁에 당신에게(김미라, 책읽은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