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무변(廣大無邊)하게 펼쳐진 산자락, 여인네들 치마 주름처럼 아름답게 휘감아도는 능선,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하게 느껴지는 계곡들, 유장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풋풋한 생기를 잃지 않은 원시림, 속박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날고 뛰는 동물들, 그리고 선계(仙界)를 드러내듯 장엄하게 펼쳐지는 운해(雲海)..... 이것이 지리산의 전부인가?

아니다. 지리산은 또 사시사철 독특한 풍류로, 계절마다 천차만별의 변화로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지리산의 뚜렷한 개성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풍광(風光)들을 8경(景), 혹은 10경(景)으로 묶어낸 것도 진정 이 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일 터, 그래서 여기에 지리산을 찾는 이들이 놓치지 않아야 할 신비한 경관들을 소개합니다.














회색빛 구름바다 저멀리 동녘 지평선 위에 서기(瑞氣)가 어리기 시작하여 붉은 광채가 길게 번져나 가고 극광(極光)이 퍼지면 원시의 개벽을 보는 것 같아 장엄하기만 하다.

역광으로 반사되는 은빛 구름에 봉우리만 까만선을 그리며 자태를 드러내고 세상은 천연 커튼이 열리면서 지리산의 환타지는 시작된다.















지리산 서쪽, 해발 1,507m의 높이로 솟아있는 노고단은 이 산의 수많은 봉우리들 중에서도 영봉(靈峰)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화엄사 계곡을 따라 오르는 10㎞의 노고단 산행 코스는 중간부터 가파른 길이 이어져 숨이 턱턱 막히기도 하지만,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경관은 4시간 남짓의 힘든 산행을 한층 뿌듯하게 해줄만큼 장엄하다.
특히, 노고단 아래 펼쳐지는 '구름 바다'의 절경(絶景)은 가히 지리산을 지리산답게 만드는 제1경(景)이라 불러도 손색없다.

화엄사 계곡의 끝머리 바위턱에 앉아 파도처럼 밀려갔다 밀려오며 계곡을 덮고 능선을 휘감아 돌다 저 들녘까지 이르러 온통 하얀 솜이불을 깔아놓은 듯 펼쳐지는 운무(雲霧)를 바라보고 있느라면 잠시 인간 세계를 벗어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신비롭기 그지없다.
노고단은 지리산 종주 코스의 출발점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임걸령-반야봉-토끼봉-벽소령-세석평전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장장25.5㎞의 지리산 능선길은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밟아보고 싶어하는, 영원한 동경(憧憬)의 코스다. 봄에서 초여름까지 노고단의 비경(秘境)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원추리꽃이다. 운해와 샛노란 꽃망울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경치는 가히 제1경이라 할만하다.


이곳이 얼마만큼 멋드러진 산중(山中)인지를 웅변해주는 상징물로 이국(異國) 선교사들의 별장터가 있다. 1930년경에는 50여채나 들어섰다는 서양 선교사들의 별장은 여순(麗順) 사건의 와중에서 대부분 불타버리고 지금은 서너군데 돌담터만 옛 추억을 간직한 채 고즈넉하게 서 있다. 이제는 성삼재까지 포장도로가 뚫려 아이들도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오를 수 있는 코스가 개발돼 한층 가까워진 봉우리, 노고단, 그 정상을 향해 터벅터벅 산길을 오르다보면 곳곳에서 다람쥐들이 뛰쳐나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재빨리 사라진다.














해발 1,751m로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은 노고단에서 바라보면 마치 여인네의 젖가슴처럼 봉긋 솟아있는 봉우리다. 노고단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3시간 30분 가량의 산행 코스인 반야봉은 사방이 절벽 지대로 고산(高山)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반야봉에 오르는 기쁨은 낙조(落照)의 장관에서 찾는다. 여름 날 해거름에 반야봉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서쪽 하늘의 황홀한 낙조는, 아마도 자연이 인간을 위해 베푸는 시시각각의 축제 중에서도 가장 경건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축제가 아닐까? 때로는 구름 바다를 검붉게 물들이며, 때로는 마지막 정염(情焰)을 불사르듯 선홍(鮮紅)의 알몸으로 서서히 스러지는 태양과 마주하는 순간, 사람들은 아득히 먼 시원(始原)의 날에 시작된 한편의 장엄한 드라마가 끝난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뉘 가는 길이 저토록 눈시리게 아름다우랴.














「어두운 밤, 숲 뒤의 봉우리 위에 만월이 떠오르면 그 극한의 달빛이 천지에 부스러지는 찬란한 고요는 벽소령(碧宵嶺)이 아니면 볼 수 없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심산유곡 고사목과 밀림속에서 허공에 걸린 달을 쳐다보면 여기가 바로 선경이 아닌가 싶다.















고색 창연하게 이끼 낀 기암괴석 사이에 향기높은 기화요초(琪花搖草)가 철따라 피어나는 선경으로 위에는 자연고사목 지대가 펼쳐져 있고 아래로는 수백 년이 지나도 푸르름을 자랑하는 원시림이 가득 하다.

















금강산을 방불케 하는 청학봉(淸鶴峰과) 백학봉(白鶴峰) 사이의 험준한 골짜기속의 깊은 낭떠러지 폭포로 오색 무지개가 걸리고 백옥같은 물방울이 서린다.

60m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장쾌한 폭포 소리가 온몸을 파고드는 냉기는 몸과 마음이 얼어 붙는 긴장감을 느낀다.















구례 읍내를 거쳐 하동쪽으로 난 길을 달리는 기분은 어느 때고 상쾌하기 이를 데 없다. 섬진강의 투명한 물결이 시샘하듯 함께 달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읍내에서 출발해 10여분을 달리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인 외곡리에 이르면 소담스런 소나무 숲이 보인다.
이곳 역시 여름철이면 인파가 몰리는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피아골 상류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계곡물이 섬진강에 다다르기 직전에 잠시 머무르는 곳이다.

구불구불 산길을 헤치며 피아골로 향하는 도중에 만나는 풍경도 장관이다. 옥수(玉水)처럼 깨끗한 연곡천 물결이 돌멩이에 부대끼며 토해내는 흰 포말이 언뜻언뜻 스쳐가고,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시골집들의 다정스런 모습이 아련히 옛 추억의 갈피를 더듬게 만드는 길, 늦여름부터는 산을 뒤덮는 밤꽃의 비릿한 내음이 오히려 싱그럽게 코끝을 스치고, 길게 이어진 논다랑이는 벼 익는 소리가 들려올 듯 가까이 잡힌다.


연곡사를 지나 4㎞쯤 더 오르면 울창한 밀림이 보인다. 지리산 최대의 활엽수림 지대인 이곳 피아골은 4계절이 다 절경으로 어느 때나 밀려드는 인파로 성시를 이룬다. 봄이면 진달래, 여름이면 짙은 녹음, 겨울이면 설경까지 아름다운 피아골, 그러나 가을의 단풍은 천하제일의 경치로 손꼽힐만큼 아름답다.
10월 하순경에 절정을 이루는 피아골 단풍은 현란한 '색(色)의 축제'다. 사람의 손으로는 빚어낼 수 없을 온갖 색상으로 채색한 나뭇잎들, 그들이 한데 모여 발산하는 매혹적인 자태는 능히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산(山)도 붉게 타고, 물(水)도 붉게 물들고, 그 가운데 선 사람(人)도 붉게 물든다는 삼홍(三紅)의 명소, 피아골의 단풍은 가을 지리산의 백미(白眉)다.














봄이면 난만(爛漫)히 피어나는 철쭉으로 온통 꽃사태를 이루는 세석평전은 30리가 넘는 드넓은 평원으로 남녘 최대의 고원이다. 이름 그대로 잔돌(細石)이 많고, 시원한 샘물도 콸콸 쏟아지는 세석평전에는 수십만 그루의 철쭉이 5월초부터 6월말까지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며 한바탕 흐트러진 잔치가 벌어진다. 피빛처럼 선연하거나, 처녀의 속살처럼 투명한 분홍빛의 철쭉이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지는 절정기에는 산악인들의 물결로 세석평전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시인 김석(金汐)은 "세석 계곡 가득히 피어있는 철쭉꽃, 그 사이사이로 울고 있는 뻐꾹새 소리, 훈풍이 꽃 사이로 지날 때마다 꽃들의 환상적이고 화사한 흔들림, 그것은 남녘 나라 눈매 고운 처녀들의 완숙한 꿈의 잔치"라고 이곳의 철쭉을 노래하기도 했다. 지리산 철쭉은 조정래의『태백산맥』의 처절하도록 서럽게 그러나 꺾이지 않는 의지의 화신(化身)으로 등장하는 진달래와 더불어, 봄의 지리산을 단장하는 명물로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천왕봉에 뿌리를 둔 급류가 절벽을 뚫고 깊은 계곡을 이루는 우리나라 3대계곡 중의 하나로 (七仙洞)에서부터 계곡은 오를수록 선경으로 장관을 이룬다.
















산이 높으면 물도 맑다. 지리산을 남서로 감돌아 남해에 이르는 섬진강(蟾津江)은 그 물이 맑고 푸르러 한 폭의 파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강 양쪽에 펼쳐진 백사장도 하얀 명주천을 깐 듯 아름답다.

급류를 타고 오르내리며 은어떼를 낚는 어부의 모습도 아름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