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과 함께!

                            

오늘부터 요한복음을 조금씩 묵상하려고 합니다. 
제가 무슨 영성이 탁월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학적으로 
많은 깨우침이 있는것도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믿음의 분량만큼 성령께서 
제게 가르쳐 주시는 소리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말씀을 상고할 때에 어줍잖은 내 생각에 머물지 않고 
성령님께서 조금씩 비춰주시는 가르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태초에(요한복음 1장 1절)-8월25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참고) 

어거스틴은 그의 '신국'에서, 자기 친구 심플리시우스가 들려 준 한 철학자 
플라톤의 이야기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신국 10권 29장). 그에 의하면, 
그 철학자는 요한복음의 이 첫 구절은 "황금으로 기록해 둘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태초에라는 이 단어는 제가 읽을때마다 아득해짐을 느낍니다. 
마치 끝없는 나락에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을 매번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시간개념으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창세기를 처음 대할때와도 묘하게 겹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스럽게도 요한이 처음 서두를 장식한 이 “태초에”라는 
말씀을 읽을때마다 지체없이 창세기의 첫 말씀을 떠올립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도대체 태초라는 시간적인 것은 그 시점이 그 출발이 언제일까요? 
제가 주석을 찾아보니까 이렇게 설명이 되었습니다. 

“태초에 - (베레쉬트). 70인역은 이 말을 요 1:1과 같이 '영원부터'란뜻을 
지닌 '엔 아르케'로 번역했으나 원래의 뜻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로써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태고사에 관한 서술임을 
암시한다. 한편 공동 번역은 이 말을 '한 처음에'라고 번역했는데 여기서 '한'은 천지 
창조의 단회성을, '처음'은 만물의 출발점을 각각 강조하는 말이다.” 

도무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예 불가능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시간이라서 
어떻게 설명이 안되는군요. 그 말은 정작 저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과학적 지식과 수학적 산술로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공룡시대를 소재로한 영화가 크게 힛트를 했을 때 저도 본기억이 납니다. 
엄청나게 큰 공룡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영화로 만든 
제작자들에게 놀라고 정말 그시대에 살았던 공룡과 함께 만일 내가 살았다면 
생각만해도 아찔합니다. 또 언젠가 광활한 우주공간을 소재로한 영화를 보고는 
또 역시나 그런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놀라고 어마어마한 우주를 보면서 
아찔했습니다. 

지구라는 별이 우주안에서 그렇게 작은것을 알았을때의 놀라움역시 
충격이었지요. 그러나 이렇게 놀라워하던 끝이 없을것 같은 우주보다도 더 큰 
존재가 있다는 것에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주보다도 더 큰 존재가 있다는걸 알았을 때의 놀라움이란 
마치 멍한 상태와 같습니다. 믿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상의 세계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애써 부정해버렸지요.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순간에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매우 가까워졌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성경이 뭔지도 몰랐던 그때에 뭔가에 홀리듯이 
처음 읽은것이 창세기였습니다. 

밤을 세워가면서 단숨에 읽어간 창세기는 제게 커다란 놀라움이었고 
또 어느순간에 요한복음을 읽고서 놀랐던것이 기억이 납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생각했다고하였을때 
처음을 하나님께서 열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최초의 혹은 태초라는 
시발점의 그 뒤에도 무엇인가가 존재했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것이 뭘까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이죠.  이것을 언어적으로 표현하자면 “영원” 이라는 
것이겠지요. 아득하지 않습니까? 

유일하게도 자존하시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이스라엘만의 민족적 신을 초월하시는 온 우주와 온 만물을 창조하시고 
붙드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요한의 이야기는 바로 그 태초에 또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영원전부터 계셨는데 
그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또 있었다는 요한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무었이냐면 “말씀” 이라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요한이 하고 있습니다. 
아주 처음부터 단단히 작정을 하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으로 미뤄야 겠군요. 

처음 시작이라 상당히 버벅댑니다. 차츰 좋아지겠지요. 

샬롬~  


by 작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