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눈사람

내가 아홉 살 때 우리 엄마는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습니다
엄마는 내가 사는 산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2층 집에서 살았고
한 달에 한 번 집에 왔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던 고물상이 기울대로 기울어 먹고 사는 일이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식모살이를 간 부잣집에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할머니 곁에서 끼니를 챙겨 
드리고 병수발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 해 겨울은 다복다복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산동네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고물상 앞마당은 온통
눈밭이었습니다

한 밤중, 그지없이 아름다운 눈밭 위에 서면 눈부시게 
명멸하는 푸른 별빛들...
그 별빛은 엄마의 얼굴이었다가
엄마의 눈빛이었다가
어느새 엄마의 눈물이 되곤 했습니다

매일 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은 날이면 형과 함께 먼 길을 걸어 엄마가 
일하는 2층집으로 갔습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 길가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엄마를 부를 수는 없었지만 그 곳에 가면 엄마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겨울 햇살이 푸슬푸슬 둥지를 튼 담벼락에 기대앉아
형과 나는 아무 말 없이 해바라기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느 추운 날이었습니다
엄마가 살고 있는 집 대문 앞을 서성이는데
엄마 얼굴이 보였습니다
엄마는 2층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습니다
내가 엄마를 부르려하자 형이 내 입을 틀어막고
나지막이 속살거렸습니다

“엄마 부르지 마. 엄마한테 혼난단 말이야.” 
하지만 나는 끝내 엄마를 소리쳐 불렀습니다
내 목소리를 듣고 엄마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보름이 넘도록 엄마 얼굴을 보지 못한 나는 울면서
엄마품에 안겼습니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의 따뜻한 품속에서 나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으니까요…
그 때, 내 나이 겨우 아홉 살 이었으니까요…
엄마는 말없이 내 등을 쓸어주었습니다
엄마의 젖은 눈속엔 라일락 흰 꽃송이가
하늘하늘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우리 형제를 대문 앞에 세워두고 잠시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엄마는 주황색 라면 봉지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라면 봉지는 안에는 엄마가 주인 할머니 몰래 가져나온 
갈비 세 개가 들어있었습니다
“집에 가서 누나하고 하나씩 나눠 먹어
그리고 엄마하고 약속해. 다시 는 여기 오지 않겠다고.”

“......” 

마음 밭 깊은 곳에 할 말을 묻어두고 형과 나는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얼은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엄마는 따뜻한 
손으로 닦아주었습니다. 

짚단 같이 서 있는 엄마가 콩알만큼 작아질 때까지 
나는 뒤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산동네 고갯길에서 허기진 형과 나는 
라면 봉지에 들어 있는 갈비를 하나씩 꺼내 먹었습니다
고기를 뜯어 먹고 손에 묻어있는 양념을 모두 빨아먹고
그것도 모자라 갈비 냄새가 배어 있는 손끝 을 몇 번이고 
코끝에 갖다 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갈비 하나가 들어있는 라면 봉지를 누나에게 주었습니다

“누나 이거 먹어. 엄마가 준 건데 진짜로 맛있어.” 

“철환이, 너 먹어.” 

누나는 갈비를 먹지 않고 막내인 나에게 주었습니다
누나도 겨우 12살 초등학생이었는데…
방 문 밖, 의자에 앉아 누나가 준 갈비를 먹고 있는데 
열려진 방문 틈 사이로 봄맞이 꽃처럼 창백한
누나 얼굴이 보였습니다
누나는 라면 봉지에 묻어있는 갈비 양념을 
조그만 손으로 찍어먹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날 밤 늦도록 산동네 어둠을 찢으며 까마귀 울음소리가 소소했고
누나의 창백한 얼굴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도 엄마가 보고 싶으면 나는 형과 함께 
엄마가 사는 집으로 갔습니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던 그 해 겨울
은피라미처럼 반짝거리며 눈송이가 사륵사륵 길 위에 내려앉으면
형과 나는 발 도장을 찍어 눈밭위에 오불오불 꽃잎을 만들었습니다
배가 고파오면 엄마가 가르쳐준 노래도 불렀습니다
엄마가 살고 있는 집 대문 앞에 쌍둥이 눈사람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형, 우리는 쌍둥이니까, 쌍둥이 눈사람을 만들어 놓고 가면
엄마가 좋아 할 거야. 그치?”
“.......”

형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형, 엄마는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가 봐…….”
고개만 끄덕일 뿐 형은 여전히 말이 없었습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에 우두망찰 서 있다가 ‘찌찌찌찌......
곤줄박이 우는 소리 자욱이 자지러지는 저녁
우리는 눈길 위에 다문다문 발자국을 찍으며 산동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추운 겨울이 두 번 지나도록 엄마가 있는 집까지 그 먼 길을
오가며 우리 형제는 배춧잎처럼 나박나박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어린 자식들 잠든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엄마가 매일 밤 산 
동네 집에 다녀갔다는 것을…….
달빛 내린 창가에 서서
어린 자식들의 얼굴을 엄마가 눈물로 바라보았다는 것을
나는...... 나는 20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일하던 2층 집 담벼락에 몽당 크레파스로
꾹꾹 눌러 써놓은 ‘엄마’는 아직도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았는데…
내 어린 시절은
몇 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지금도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데…
그 때를 생각하면.....
그 때를 생각하면.....
아아,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끼니를 걸렀다는 자식의 한 마디 말에도 가슴이 무너지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과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를 가슴 가득 안고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분들께 이 글을 바칩니다

이철환의 <곰보빵> 中 에서


♪ 거위의 꿈 - 인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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