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무향(眞水無香)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물 가운데서도 참으로 깨끗하고 맑은 물은 일체 잡스러운 내음을 풍기지 않는 법"
이라는 뜻이지요.

그 글귀에서 한자씩 따서 진향(眞香)이라 예명을 지은 기생(妓生)이 있었으니,
본명은 김영한(英韓)입 니다.
그 녀는 우리와 동시대를 얼마전까지 살었고, 죽기전 1,000억대가 넘을
성북동 북악산 자락에 위치했던 그가 소유했던 요정 ‘대원각’ 을 ‘길상사’ 절터로 기증하여
세인들에게 회자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져 날려보내며
생을 마감한 사람입니다.

또 妓生 眞香이는,
한국 현대시사(詩史)의 전설적 詩人이 된 ‘백석’을 지독히 사랑했던 기녀로
그 사랑 이야기는 문단뿐아니라 세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짧은 사랑후 이별하게된 백석(白石)과는 해방후에 같은 하늘 아래서 살면서도,
북에 있는 그를 사무치게 그리워만 할뿐, 남북분단이라는 비극에 파묻혀,
영영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 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알기쉽게 한편의 시로 축약(縮約)하여 표현 해낸 시인이 있으니,
`내가 사랑하는 바다 성산포’라는 詩로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이생진’ 시인의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란 詩입니다.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

- 이생진


함흥 기생 眞香은 24살때,
25세인 시인 靑年敎師 백석(白石)을, 어느 연회 자리에서 만납니다.
번개가 섬광(閃光)을 치듯, 찰나적인 그 만남은, 서로
식을줄 모르는 사랑의  불만 붙은채, 그리움만 남기고, 평생 재회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세월만 흐르게 되는 비극적인 사랑인 運命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첫 만남에서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때 까지 이별은 없을것’ 이라는 백석의 약속은,
바로 즉시
그의 집안의 완강한 반대로 오래가지 못합니다.
당시 장래가 촉망되던 엘리트 시인 ‘백석’의 집안에서는 당연히 그의 부모가 기생과의 만남을 극력 반대하며
서둘러 다른 규수와 강제 결혼을 시킵니다.

백 석은 고민 끝에 결혼식날 초혼밤. 신혼방을 빠져 나와
한양에 있는 영한에게 달려와 함께 만주로 달아 나자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백석을 사랑하는 영한은,
‘백석’의 장래를 위하여는 자신이 사라져 주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랑하기에 헤어져야 한다”는 신파조 이야기처럼, 따라나서지 못하고 헤어지게 됩니다,  
아~! 애석하다.~! 그것을 끝으로 그 녀는
숨 넘길 때까지 백석을 향한 사무친 그리움만 쌓아 갔을뿐,
이승에서는 영영 만나지 못합니다.

영한과 이별후, 그때 심정을 후일에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는,
현대시사에도 길이 족적으로 남을 명시로 써서 표현합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란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김 영한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 되자,
16세 어린나이에 호구지책으로 시집을 갔으나, 1년 만에 남편이 죽고, 모진 시집생활을 견디지 못해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하규일(1867~1960)명인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됩니다.

이후 김영한은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할 정도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었으며 몇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기생이기도 했습니다.
국악계에서는 김진향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백석은 영한과 이별한 그 이후 조국을 떠나 만주 벌판을 헤메이었고,
해방후 이북에 머물렀다가, 6.25전쟁과 남북분단으로 이북의 사람이 되어, 결국 애타게 그리던 영한이와는
영영 생이별하게 되어 이북에 뼈를 묻습니다.

또 한편, 백석을 떠나보낸 영한은 사무치는 사랑의 한으로 마음의 방황을 이기지 못하여,
중국을 향하는 배에서 바다로 투신도 하려 했으나,
언젠가 만날 수도 있다는 한가닥의 희망과,
만나면 활짝 웃으며 반겨줄 白石을 생각할때 삶에 愛着을 느끼고, 삶에 대한 새로운 용기를 얻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나서게 됨니다.

이 후 名妓 眞香으로 억세게 財産을 모은 그녀는 6·25동란의 砲聲이 멎고 몇 해 지난 1955년
새로운 땅을 삽니다.
그녀는 평소 서울의 대표적 宮인 景福宮의 뒷산인 북악산 자락이 끝나는 성북동 기슭에
풍광이 아름다운 맑은 溪谷이있는 땅을 눈여겨 보아두었던 것입니다.

이 때는 전쟁의 여파로 산업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어느기업가도 여간 해서는 새로운 事業에 투자를 엄두를 못 낼 때였습니다만,
그녀는 과감하게 그 그윽한 골짜기 2만여평의 숲을 계약하였던 겁니다.
그러나 그 이후 제때에 利子와 元金을 갚지 못해 경매대상이 되기도 합니다만,
마지막까지 지켜낸 絶景地 7천여 坪은 그의 構想대로 가꾸어
요정 ‘대원각’ 되는 것입니다.

眞香이 ‘料亭 經營人’으로 맹활약할때,
대원각은 前에도 後에도 없을 至上의 최고의 호화로운 향연을 벌이는 장소이던 곳이지만,
이젠 법정 스님을 통하여 기증 되어,
‘길음사’란 佛寺로 바뀌고 정토(淨土)의 장소로 탈바꿈 되었습니다.
이 사찰의 이름은 그녀의 법명인 ‘길상화’를 본 따
‘길상사’라 명명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혹 기회가 되어 길상사를 지나치며 들리시게 되면,
수목 우거진 언덕 한켠에 김영한의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어는 것을 보실겁니다.  
그 자리에서 ‘사랑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하셨다면, 그 비석은

“삶이란
그저 그언덕 위로 불어오는 바람같은 것이라고...
우리에 삶은
그저 스처가는 바람과 같은것 이다.” 라고,
‘眞香과 백석의 사랑이야기’ 를
들려주며 이야기 해줄겁니다.

이제 저의 글 말미에,  
백석의 시중에 가장 진수(眞髓)라 할수있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라는 시를 올려드리며 글을 맺습니다.
한국 현대시에 제일로 손꼽히는 시로,
제목이 주는 뜻은 백석이 ‘남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 집에 세들어 살며’ 라는 뜻입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1948년 백석



저 는 가끔 이 시를 홀로 나지막히 소리내어 읽다보면, 구구절절히 사무치지 않는 구절이 없으며,
당대에 동경 유학생출신 엘리트로, 조각같은 준수한 용모를 지녔고,
촉망받던 교사요 시인이었던 그가, 쓸쓸하게 타향 골방에 추위에 떨며 움크리고 있을것을 상상하면 슬퍼지고,,  
한편, 그를 평생을 사무치게 애모하면서도
끝내 재회하지 못하고 `애달픈 삶`을 살다 그 그리운 맘을 그대로 간직한채
이승을 떠나간 眞香의 애닮은 사랑 이야기가 오버랩 되어 슬퍼지고,
또 한편 나 역시 나이 먹어감에 쓸쓸해져가는 미래의 나를 생각하노라면,
백석의 말처럼, 괜시리 “내 가슴이 꽉 메어 올때도 있고,
눈에 뜨거운것이 핑 괴일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가 비탄만 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장하게 느껴지는것은, 끝으로 갈수록 시인은 자신을 추스르며,
흰눈을 맞으면서도 ‘굳고 정하게 서있는 갈매나무'를 생각하고, 처한 현실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점차 허리를 고추세워가는 그의 모습을 상상할때,  나 자신도 삶의 역정속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닥칠지라도 새롭게 몸과 마음을 고추 세워가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긴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나무-


♬♪^. Reflections Of Love/ Hilary Stag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