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로 버틴 그때 그 시절, 항상 그렇게 살고 싶다/최영미


서른살이었을 때, 나는 내 삶이 벼랑 끝에 와 있다고 느꼈다.
당시 난 대학원에 휴학계를 내고, 어느 자그마한 사회과학 출판사에 어렵게 취직해
막, 일을 배우고 있었다. 입사한 지 석달이 겨우 됐을까 말까.
며칠 간의 휴가가 끝날 즈음 회사에 전화를 걸어보니, 이제 나올 필요가 없단다.
그 사이에 사장이 바뀌며 내가 '짤렸다'는 말이었다.
'내가 짤렸다'는 게 실감이 나기도 전에, 난 그무렵 몇달째 사귀던 남자에게서
일방적으로 '짤리고' 만다.

실직한 지 한 두어 달 쯤 지나서였다.
며칠 째 연락이 없던 그에게서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없이 짧게 용건만 말하는 그에게
나 또한 짧게 "알았다"고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참담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즈음 집안 사정이 엉망이었다.
세 자매의 장녀로서 서른이 다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놀고 먹는 나는 기울어가는 우리 집의 혹이며 미운 오리 새끼였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내가 채워야 할 하루의 시간들이 먼지처럼
빼곡이 밀려와 방 한 구석에 쌓였다. 답답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 한 두 사람과 이따금씩 전화통화를 하는 게
세상과 나를 잇는 유일한 끈이었다.
바깥으로 직접 뚫린 창문이 없어 대낮에도 어두침침하던 방에서
나는 낮을 밤처럼, 밤을 낮처럼 살았다.
담배 연기만 자욱하던 방에 감금된 채 하루하루를 죽이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내 방문을 활짝 열어 젖히셨다.

그러더니, 다짜고짜로 그 때까지도 이불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뭉기적대던 딸년의 발치를 발로 툭툭 치시며 말씀하셨다.
"네 인생은 실패다. 나이 서른에 네가 남자가 있냐 애가 있냐. 돈이 있냐 명예가 있냐.
넌 이제까지 뭐하고 살았니?"
실...패. 당신께서 불쑥 던진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그 날부터 난 서른살을 앓았다.
깃털처럼 한없이 가벼워지다가도 어느 순간,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무겁게 추락했다.

그동안 말만 듣던 디스코텍에 가서 혼자 미친 듯이 춤을 춘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난 냉정하게 내 인생의 대차 대조표를 작성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 지, 그래서 얻은 건 무엇이고 잃은 건 무엇인 지......
나는 나의 무게를, 내 삶의 무게를 세상의 저울에 달아 계량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숨막히는 이 집을 벗어나 어딘가로 가야 했다.
더 이상 돈 못 벌어온다고 어머니에게 구박당하고,
동생들에게 멸시당하며 눈칫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른살이었을 때, 나는 신림동의 어느 고시원에 있었다.
고시공부를 하려고 들어간 게 아니라 달리 있을 데가 없어서였다.
그 당시 고시원은 서른이 다 된 여자에게 가장 싸고 안전한 숙소였다.
한 달에 20만원으로 하루 세끼 먹여주고 재워주고 독방에다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도 있는,
그 곳은 내게 천국이었다.

친구에게서 빌린 돈으로 다섯달치 방세를 선불하고 나니 수중엔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지독한 독감에 걸렸는데 쌍화탕 하나 사먹을 돈이 없었다.
열이 펄펄 끓는 몸을 끌고 헌책방에 가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를 팔아 천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었을 때의 쓰라린 감격이란......

그러나 나는 그 시간들을, 이십에서 삼십에 이르는 그 가파른 세월을 잃어버린 것만은
아니었다.
그해 가을에서 겨울까지,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 나는 쓰라린 청춘을 회상하며 최초의
시들을 뱉어냈다. 그 핏덩이같은,
상처받은 짐승의 비명같은 시들이 모여 어찌어찌 하여 등단을 하고
시집을 펴내게 되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나는 오랜 실업자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시인이 되었다.
그 제목과 달리, 내겐 진짜 잔치가 시작된 셈이다.
남이 차려준 밥상이 아니라 내가 손수 재료를 선택하고 요리한 진정한 밥상.
서른은 내게 그런 나이였다.

올해로 내 나이 서른 아홉. 마흔을 코 앞에 둔 지금,
가끔씩 난 내가 아직도 서른살이라고 느낀다.
서른살처럼 옷을 입고 서른살처럼 비틀거리고 서른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흔한, 그 잘난 희망이 아니라 차라리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질길 절망을 벗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아무 것도 붙잡을 것이 없어 오로지 정든 한숨과 환멸의 힘으로 건너가야 했던
서른살의 강


그 강물의 도도한 물살에 맞서 시퍼런 오기로 버텼던 그때 그 시절이
오늘밤 사무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