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들에 서 있는 지게 하나-


사람 하나 세상에 와서 살다 가는 것이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고,
베어지는 풀꽃과 같다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아침 안개처럼 살다 홀연히 떠나버려도 그
로 인해 아파하는 가슴 들이 있고,

그리운 기억을 꺼내어보며 쉽게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 질 녘 밭에 갔더니 시아버지의 지게가
석양을 뒤에 지고 비스듬이 기대어 있었다.
생전 에 그 분 성품을 말해 주는 듯 꼼꼼하게 싸매어 파라솔 아래 묶어 두었다.
겨우 이세상 떠 난 지 보름 되었는데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지게
작대기는 아득한 옛날로부터 와서 서 있는 것 같았다.
지게에 눈을 두지 않으려 애써 피해도 다시 눈이 거기에 머물었다.

‘언제 와서 다시 쓰시려고…’

혹시 발자국이 있을까 싶어 밭고랑을 살펴보았다.
자식 돌보듯 키운 대파가 굵은 몸피에 쭉 쭉 곧은 잎을 달고
여전히 밭을 지키고 있다.
텅 빈 들판에 유독 푸르게 서서 가을과 겨울
이 오고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한 떼의 바람이 우수수 지나간다.
시아버지는 세상에 사는 동안 최소한의 소비를 하다가 가셨다.
변변한 양복 한 벌이 없었다.

이십여 년 전에 맞춘 양복을 깨끗이 손질해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입으셨다.
새 옷을 마련해 드린다해도 마다 하고 아들이나
사위의 입지 않는 옷들을 갖다 입으셨다.

비오는 날이면 돋보기를 콧등에 걸치고 헤진 신발이나
살이 부러진 우산 등을 고치셨다.
내가 버린 쓰레기 중에 구멍 난 양말이나 장갑, 겉이 성한 볼펜,
또 당신 보기에 희귀한 물 건들은 어김없이 주어 다시 내게 주셨다.
나는 못 신게 된 신발을 시아버지 몰래 버릴 연구 를 하기도 했다.
돌아가신 뒤에 시어머니는 장롱 정리를 하셨다.

작년 생신 때 아이들이 선 물한 새 런닝셔츠가 ‘할아버지 생신 축합니다’라고
쓰인 쪽지를 그대로 붙인 채 나타나자 목을 놓아 우셨다.
목이 늘어난 양말은 늘 그 분 것이었고 바닥에
자작자작 남은 생선찌개를 물리시며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음 끼니에 내가 먹을테니 버리지 말아라”

신문지나 파지를 잘라 두고 당신 방에 화장지 대신 쓰셨다.
세수하고 난 물은 버리지 않고
놓아두셨고, 면도할 때도 작은 대야에 절반도 안 되는 물만 떠 가셨다.
시어머니 회갑 때 바쁜 며느리 대신 손주를 돌보셨다.
기저귀 빨래를 할 여유가 없어 일회 용 기저귀를 사용했는데
빨랫줄에 종이 기저귀가 하나 둘 널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 니 말려서 한 번 더 써도 되겠다 싶어
시아버지께서 널어놓은 것이었다.

우리들은 한바탕 웃 으며 딱딱하게 굳어져 다시 쓸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 드렸지만
웃음 뒤끝에 가슴이 따금거 리는 무엇이 남아 있었다.

웃어른으로서 나를 제일 편하게 해 주신 것은 뭐든지 잘 잡수셨다는 점이다.
뇌출혈로 갑자 기 돌아가시기 전 날까지
반찬 투정 한 번 없이 해 드린 음식을 맛있게 드셨다.
그리고 열심 히 일을 하셨다.
일혼 일곱 연세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지게를 지고,
자전거를 타며 들을 오 가셨다.
체질이기도 하겠지만 잠시도 쉬지 않으시니 몸에 살이 붙지 않으셨다.

사실 시아버지는 왼 손이 조막손이었다.
젊었을 때 병이 나서 침이니, 뜸이니 온갖 민간요법을 썼는데
그렇게 손이 굳어버렸다 했다.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뛰신 시어머니 이야 기는 가히 무용담을 능가한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면 꼭 한 손은 뒷짐을 지셨다.
손주들이 말을 배우고나면 “할아저버 지 손 아파?”하고 물어보곤 했다.

그런 손으로 한 시를 가만히 앉아 있지 않으셨다.
하다못해 구멍난 면 장갑을 깁고 줄여서
왼손을 위한 장갑 만들기라도 하시는 것이었다.
돌아가신 뒤에 가족들은 뭉퉁한 장갑들을 보
면서 많이 울었다.

그분은 멋쟁이셨다.
외출을 하시는 날은 최소한 두 시간을 단장하셨는데
면도, 세수, 머리감 기, 옷매무새 고치기…
끝으로 내게 머리 기름을 발라 머리 손질을 해달라셨다.
그리고 연미 복 입은 제비처럼 말쑥하게 외출을 하셨다.
그렇지만 약주를 거주하게 드시고 돌아오실 때는
아침에 준비하고 나갔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나를 종종 웃게 하셨다.

잔정이 워낙 많아서 아는 분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집에 찾아온 방문객은 동네 어 귀까지는 배웅을 하셨다.
아이들을 좋아하셨으며 아이처럼 천진한 웃음을 띄우던 분이셨다.
술을 좋아하셨지만 그 분을 아는 사람들 중에
그 분을 싫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분을 좁쌀 영감님이라고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좁쌀 영감님을 그리워할 때
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잘못한 것만 생각나는 이런 아픈 그리움
이 될 줄을 그 때는 몰랐다.

돌아가시기 전에 나와 함께 했던 일은 짚 바늘 쌓기였다.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빙 돌아가 며 짚단을 쌓아 가는 것인데
나는 짚단을 가져다 던져 올리고 시아버지께서는 받아서 쌓아 올렸다.
맨 꼭대기 지붕을 만들 때, 한 손으로도 능숙하고
꼼꼼하게 짚을 엮는 솜씨를 유심 히 보았었다.
그 논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짚 비늘 하나 하나를
그냥 보며 지나치지를 못한다.

파도가 모래성을 쓸어가듯 아버지의 흔적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손수 해 놓으신 짚 비늘
도 겨우내 소먹이로 헐어졌다.
그 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던 들길을 따라가며
들을 지키고 서 있는 빈 지게 하나 있다.
세상에 와서 맡겨진 짐을 묵묵히 두 어깨에 지다가
모든 것 벗어놓고 훌쩍 가신 아버지의 외 로운 발자국이 있다.

어느 날 아지랑이 실린 그 지게를 남편이 지고
아버지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200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