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K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 P 형! 요즘 신혼 살림은 재미 좋으신가?"
"아....네! 출장 끝나셨나 보죠? 지금 어디세요?"
"음.....나 지금 공항인데 부천에 기가막힌 앰프 기술자가 있다고 해서
그리 가 볼 생각인데.....P 형 생각이 나서 말이야"
"예? 아 그럼 당연히 나랑 같이 가셔야지요.
제가 지금 공항으로 갈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나는 집에서 입던 복장 그대로 허겁지겁 차를 몰고 김포로 달렸다.
공항에서 거의 2주 만에 다시 만난 K형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우리는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지체없이 부천으로 달려갔다.
그 작은 오디오 공방의 J사장은 나이는 젊지만 짧지 않은 경력과
오디오에 대한 주관이 뚜렷한 약간은 고집스런 사람이었다.
가게는 천장이 높은 지하실에 열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다.
J 사장은 자신의 경험으론 음악 감상용 진공관 앰프는 무조건
OTL(Out-put Less)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OTL이란 글자 그대로 아웃풋 트랜스가 없이,
출력 관의 신호를 직접 스피커 단자에 연결 시키는 방식으로
진공관이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스피커를 망가뜨릴 위험이 있어
적지않은 사람들이 꺼려하는 앰프였다.

그건 어쨋든.....그 날 K형과 내가 그 지하실에서 들어본 소리는 정말 엄청난 사운드였다.
J 사장은 직접 만든 진공관 앰프를 알텍 A-5 에 연결하여 여러음악을 들려주었는데,
신음 소리조차 안으로 삼키게 만드는 그 소리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에서는 팀파니 소리가 마치 우리를 정말 사형대로 끌고 갈 것 같은 위세로
적지 않은 공간을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나의 네 평 남짓한 신방에서 이런 소리가 울린다면 아마
아파트 단지에서 우리 집을 내 쫒으라고 데모라도 벌어질 것 같았다.
좌 우 스피커 하나에 앰프가 한 대씩 물리는 모노 블록(mono block) 형태로 기계무게가
한 대에 40킬로가 족히 넘는 엄청난 물건이었다.
나는 엄두가 나질 않아 귀 버리기 전에 그만 가자고 했지만
K 형은 아마도 무슨 사고를 치려고 계획을 철저히 한 듯이 보였다.

기계 가격도 엄청나고 무엇보다 앰프에 걸 맞는 스피커를 다시 선택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정이 필요한........초보자한테는 넘보아서는 안 될 프로젝트였다.
K형은 J사장과 한참동안 얘기를 뭔가 주고받고 하더니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박 형! 용산에나 잠깐 들렀다가 집으로 갑시다!"

돌아가는 차안에서 K형은 말없이 창 밖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엘라 핏제럴드의 베를린 실황 음반을 자동차의 플레이어에 밀어 넣었다.
엘라의 걸쭉한 목소리가 'Mack the Knife'를 신나게 불러 제끼고 있었지만 K형의 표정은 제법 심각해 보였다.
용산에 도착한 우리는 나의 신부를 소개해준 오디오 가게에 들러 차를 한 잔하며 새로 나온 기기 들을 구경하였다.
하하! 물건을 사간 고객은 역시 이렇게 대접이 달라지는군?

K 형은 사장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사용한지 얼마 안된 기기 들을
다시 되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자기가 쓰고있는 기기들 얘기가 아니라
나의 신부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K 형이 나에게 제안한 내용은 이런거였다.
자기는 아까 부천에서 보았던 그 앰프를 꼭 사고 싶은데
J 사장이 K형이 쓰던 앰프를 중고값을 쳐줄 수가 없다고 하니,
자기가 쓰던 앰프를 나에게 헐값에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사용하는 앰프는 이 가게에서 얼마 정도에 되 사주겠다고 하니
나는 얼마 정도의 금액만 부담하면 된다면서 꼭 그렇게 좀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는게 아닌가?

나는 "아니....K형.....굳이 그렇게까지, 그 앰프 국산인데다가 가격도 너무 비싸던데........?"
라며 말리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밀치고 올라오는 쾌재의 비명을 꾹 꾹 참고 있었다.
"으으음.....! 그래 그 영국제 비어드 앰프가 내 것이 된단 말이지.... 커헉!!"
내가 마지못해 그러마고 하자 K형은
"으헤헤헤.....역시 P 형은 물건 보는 눈이 있어!
암~~그 가격에 그 정도 앰프면 박형한테 딱이지.....딱이야!
우리 이왕 늦은 김에 다시 부천으로 갑시다. 내 저녁 거하게 살께!!"
라며 호기를 부렸다.
나는 그 날 집에서 공항으로 그리고 부천에서 용산으로, 다시 부천으로가서
그 거대한 앰프를 내 차에 싣고 K형네 집으로 갔다.

그런데 K 형 집에 와보니 아까 그 부천에서 본 스피커와 같은 알텍 A-5 가 거실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럼 그렇지 이 양반이 미국 출장 다니면서 무슨 일을 저질르긴 저질렀구먼....
그래서 오자마자 날 데리구 부천으로 갔던거구.....흐음!!
Altec 社의 'A-5' 는 극장용 시스템이다.
예 전에 극장에 가면 무대위에 양 쪽 끝으로 가정에서 쓰는 설합장 크기만한 회색 나무통에
커다란 나팔 같은 스피커가 올려져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것이다.
그 스피커가 바로 미국에서 수입한 알텍 극장용 시스템 'A-5' 이다.
요즘처럼 극장 벽에 여러 개의 작은 스피커를 매 달아 극장 안 전체를 울리는 음향 시스템이
발전하기 전 까지는 A-5 같은 대형 스피커 두 개로 영화 사운드를 듣던 시절이 있었다.
그 커다란 스피커를 가정으로 끌고 들어 오는것 역시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짓이다.
물론 음악 감상이란 같은 취미를 즐기는 K 형의 부인 역시 이 거대한 괴물을 집으로
이삿짐 센터 아저씨와 같이 낑낑대며 끌고 들어온 K 형을 더 이상은 정상인 취급을 해 주지 않았다.


J 사장의 OTL 앰프의 스피커 구동력은 역시 놀라웠다.
그 앰프의 출력관은 [6C33CB ]라고 하는 대형 진공관인데
구 소련의 'SUHOY' 전폭기에 장착된 통신장비에 사용되는 관이라고 한다.
최첨단 항공기의 정밀 통신장비에 진공관이 아직 사용된다니.......
비록 사람들의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 아날로그 시대의 유물이지만 그 동작의 안정성을 인정받아
산업용 첨단장비에 아직도 진공관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K 형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나에게 여러 가지 음악들을 들려주며
새로 들인 안주인의 솜씨를 자랑해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빨리 집에가서 K 형에게서 나에게로 분양된 비어드 앰프를
어떻게 구동해야 할 까 하는 생각만 가득할 뿐이었다.

자기 집에서 밤 새 음악이나 듣다가 내일 아침에 같이 출근하자는 K 형을 간신히 떼어놓고
새벽에 집에 도착한 나는 결국 잠 한 숨 못자고 새 색씨와 사랑 놀음(?)을 하다가 날을 새 버렸고
다음 날 아침 졸면서 가까스로 출근했다.
그 영국제 비어드에는 6BQ5 라는 어린아이 고추만한 진공관이 무려 12개나 들어가는 앰프였는데
런던 교외의 한적한 농장에서 빌 비어드(Bill Beard)라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만든 수제였다.
겉 모습은 정말 볼품이 없었지만 소리는 역시 'A-1'보다는 한 수 위였다.
그 날밤 비어드와 같은 영국제 스피커인 로져스의 궁합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그것은 내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마치 이 세상에는 없는 천상의 소리일것만 같은 아름다운 사운드였다.


나는 제일 먼저 캐롤 키드(Carol Kidd)의 85 년 앨범 [All My Tomorrow]을 들었다.
이 앨범에 수록된 'When I Dream' 이라는 곡은 영화 '쉬리' 에 삽입되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졌지만 오디오 매니아들은 그 훨씬 전 부터 보컬 테스트용 cd로 한 장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캐롤 키드는 꼭 재즈 가수라 하기는 좀 그렇지만 열 다섯 살 부터 재즈 클럽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한
경력의 소유자답게 다양한 장르의 곡 들을 자신의 감성으로 멋지게 소화 해 내는 훌륭한 여성 싱어이다.
그녀는 비록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세계 무대에서 인정 받는 가수가 되었지만
'My Way' 로 유명한 프랭크 시나트라가 그녀에게 '신이 내려준 목소리' 라는 격찬을 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세계적인 성공은 충분히 예견됬던 일이 아니었을까?


영국의 BBC 방송국에서 모니터용 스피커로 채택되고 영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기술 개발을 하는 로저스(Rogers) 社의 STUDIO-7 스피커에서 스콧틀랜드 출신의 캐롤 키드가 부르는
'When I Dream' 이 흘러 나왔다.
전주부를 연주하는 어쿠스틱 기타의 영롱한 소리가 손을 뻗으면 잡힐것 처럼 반짝이는 구슬이 되어
내 눈 앞으로 굴러 떨어졌다.
넓은 콘서트 홀에서 기타 반주 하나만으로 연주하는 두 사람의 존재와 공간의 크기가
눈에 보일 듯한 음장감으로 전해왔다
눈을 감으니 이어지는 캐롤의 목소리는 마치 그녀의 입술이 내 얼굴에 닿기라도 할 것처럼 가까이 느껴졌다.
그녀의 정확한 딕션과 린 레코드(LYNN records)의 음반들이 보여주는 하이 레절루션(High-Resolution)
녹음 기술로인해,조금 과장하자면 가수의 혀가 입 천장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리는듯 했다.

엄청난 해상력이다!

지금까지 내가 사용하던 뮤지컬 피델리티의 A-1(TR 식 인티 앰프)은 스피커를 밀어대는 구동력은
소형 앰프치고는 좋은 편이었지만, 무대에 쳐 있는 커튼 뒤에서 가수가 노래하는 것처럼
뭔가 답답한 소리 때문에 나를 괴롭혀 왔던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투박한 외모의(영국제 앰프들은 대부분 외모에는 특별히 치장을 안 하는 특징이 있다.)
볼 품 없는 금속 상자 같은 진공관식 수제 앰프는 마치 마술 상자처럼 고혹적인 목소리의 여인을 불러다가
내 코 앞에서 멋들어지게 노래를 불러주는것이 아닌가?

아! 캐롤 당신 정말 노래를 잘 부르는군요!
때로는 한 없이 부드럽고 감미롭게 때론 거구의 흑인 소울 싱어의 짙은 호소력으로 나를 감동시킨 캐롤 키드.....
(사실 정확히 얘기하면 그녀의 노래 보다는 앰프를 교체하고나서 내가 느낀 그 확연한
해상도와 임장감의 차이에 더 감동 받았다는게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 날 나는 아마데우스 사중주단을 불러서 '모짜르트'와 '하이든' 의 현악 사중주를.
'바바라 보니' 와 '피셔 디스카우'를 모셔다가 독일 가곡 '숭어' 와 '보리수' 를 즐기고
'빌 에반스' 트리오와 '덱스터 고든' 퀄텟을 초청하여 정통 재즈 공연을 밤이 새도록 즐기며
새로 들인 깨물어주고 싶도록 이쁜 색씨와 최소한 십년 해로(?)를 다짐하며 꿈 같은 첫 날밤을 보냈다.
'아! 세상에 이 음악을 이렇게 아름답게 연주해줄 수 있는 앰프가 있다니!
앰프와 스피커에 따라 소리가 이렇게나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니.....'
그 사실을 깨달은 바로 그 순간부터 나의 원음을 향한 멀고도 먼 구도의 길,
고행의 여정은 서막을 올리게 되었던것이다.

'이 소리야말로 내가 꿈에도 그리던 그 천상의 소리 구극의 원음이 아닐까......?'
하지만 이 세상에 천상의 소리가 있을리 만무하고 구극의 원음은 허황된 꿈 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그 당시 나의 희열과 감동은 너무나 강렬한 것이었다.
내가 그 동안 한 번도 경험 해 보지 못한 그 충격적인 소리의 향연은 나의 불치병 초기 증세를
점 점 악화 시키는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고있는 이 순간.....
그 시절 열정과 땀과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얻은 경험들....
누구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그 짜릿한 희열과 환희의 순간들,
그리고 후회와 비탄의 한 숨......그 모든 것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지금은 모든 욕심을 버리고 소박한 시스템으로 음악 듣기에 만족하고 있지만
그 때의 열정이 가끔씩 그리워 지기도 한다.
오디오라는 취미를 통해 버림과 비움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하면 조금 건방진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나의 경험을 통해 과욕은 불급 이라는
교훈을 함께 나누고 싶은 작은 마음일 뿐이다.


나의 음악 사랑과 오디오 사랑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