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단상(斷想)

      가을은 투명(透明)하여 숨길 것이 없다 눈과 마음을 가리는 꺼풀도 스스로 벗겨져 내린다 외로움이니, 고독(孤獨)이니 자연스레 드러난다 아무리 화장(化粧)을 하고 미소(微笑)로 감추려해도 세월 지난 흔적(痕迹)인체로 눈동자엔 그윽한 하늘이 있다 그리움이다. 딱히 정해놓은 대상은 없어도, 교감(交感)은 없었어도 막연히(漠然-)라도 불현듯 키우는 개연성(蓋然性)이 있다 살아 오면서 그리움따위 한 두개 쯤 만들려고해서 만들어진게 아니다 호기심에서, 궁금에서 출발한 모든 것 그러니까,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 되돌릴 수 없는, 이러한 아프고 아름다운 것들을 이 계절엔 굳이 추억(追憶)이라 하여도 좋고 그것들은 비밀스런 기억들에서 소중히 꺼내어 놓는다 화려한 정열의 계절과, 모두를 가두어 막아 정지시키는 계절사이에서 우리는 준비하고 정리를 한다 그 중에서도 영혼의 정화(淨化)는 이 계절만이 할 수 있는 특권(特權)이다 길을 가다 튀긴 오염(汚染)된 흙탕물같은 시간이나 살아 내느라, 그 필요에 의해 묻은 위선(僞善)의 껍질들..... 딱히 형상화(形象化)되어 눈앞에 있지도 않는 것을 그냥 놔두면 남이 먼저 차지할까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탐욕(貪慾)..... 신분(身分), 빈부(貧富)의 격(格)을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평가하고 비교하는 그 원인과 결과를 자신이 아닌, 밖에서 찾으려하는 오만(傲慢)까지..... 초조(焦燥)와 불안을 달고 살아온 자신(自身)을 돌아볼 수 있게 여유(餘裕)를 주는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답다 조금만 시간을 들여 아스팔트나, 시멘트가 없는 흙길을 걸어보자 눈을 두는 곳마다, 들리는 것 마다, 피부를 간지리는 바람까지도 몸과 마음을 가볍고 청량(淸凉)하게 한다 계절을 준비하느라 단장(丹粧)하는 모습에서 처절(悽絶)하게 세월(歲月)을 이겨 온 초목(草木)들이 사랑스럽고, 고맙다 바닥이 더 맑아지는 개울물 속, 점점 높아만 가는 하늘 금방이라도 빨려올라갈 것만 같은 파랗게 투명(透明)한 하늘빛깔 그래서 하늘도 계곡의 웅덩이에 얼굴을 담가 쉬어가나 보다 아름답게 치장을 더하는 자연에 맟춰 보자 한껏 멋을 내고 그리움과의 조우(遭遇)도 기대하며 가을 들녘으로 나서보자 차양(遮陽) 있는 모자에, 선그라스쯤에, 더하여 스카프까지 두르고 하얗게 쏟아지는 햇살에 온몸을 씻으며 느린 걸음으로 걷노라면 가슴 속인들 환히 트이며 열리지 않겠는가 그 가슴속엔 희로애락(喜怒哀樂)만이 아닌 부끄럽고 추(醜) 한 것, 아쉬움과 후회되는, 이 모든 상념(想念)이 걸어 나오리라 오늘이 있기까지 주위의 많은 도움이 있었어도 결국은, 스스로가 결정한데로 살아왔음이니.....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서 부터, 걸음마하여 나와 지금의 위치까지 자신의 인생을, 남이 이끄는데로 살은 사람은 없음이니..... 가장 낮은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쌀 뉘 고르듯, 영혼(靈魂)을 걸러내는 시간인다면 얼마나 값진 인생(人生)이 되랴...... 이제 가을도 가운데로 들어서는 듯 싶다. 나머지 가을에서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는 시간이길 바래본다. 장독대나 울타리께에서 우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랑 누런 사진첩에 갇혀 있는 정 가득한 미소들 부모 봉양(奉養) 양식을 입에 물고 내젓는 산까마귀 무거운 날개소리랑..... 자연의 소리에도 누워보자 넓은 그늘을 가진 고목(古木) 아래이면 더 좋을 것 같다. 오래전, 그보다 더 오랜 옛날에 이길을 걸어간 우리 조상(祖上)은 무엇을 이고지고 갔을까 무능(無能)한 임금을 둔 죄로 조공(朝貢)으로 바친, 우리의 딸들의 끌려가며 흘린 피눈물의 길이기도 할까 주린 배 위에, 햇살에 데워진 냇가 돌멩이 올려 놓고 밥달라 채근(採根)하는 소리 막아논, 쾡한 아이들의 눈도 밟고 지나갔으리 물레방앗간 밀회(密會)가 소문(所聞)으로 퍼져, 혹시 이 나무아래를 랑데뷰 장소로 정하였지는 않았을까 이 고목이 더 어렸을때는, 어느 가난한 조상의 어린시절 소먹이고 꼴 베다가 늘어지게 낮잠도 잤으리라 고향을 향하여, 이마에 손그늘하여 바라보자 가슴이 무거워지며 내려앉는다 늙으신 부모님과 형제들..... 나를 낳고 길러준 고향 땅..... 보란 듯이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금의환향(錦衣還鄕)은 아니어도, 한여름 바캉스 대신 고향을 찾아가, 정자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시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시원한 수박 한덩이 올리거나, 경로당(敬老堂)에 모셔 큰절 올리며 하루를 기쁘게 위무(慰撫)하여, 소소한 부모님의 마음을 한껏 기쁘게 한 적이 있었는가 까까머리 조카에게, 한번쯤 가슴에 꼭 끌어안고 꿈을 심어준 적은 있는가 그렇게 멋있게 보이는 부러움이게, 자신을 각인(刻印)시켜준 적은 있었는가 사느라 헤어젔지만,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거나 하는 코흘리개 친구를 찾아 시원한 막걸리 받아 살아온 애기를 나누어 본 적은...... 이 모두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하여 준 터이고, 한몸인 것임을 잊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억새의 살그락 거리는 소리가, 한없이 나가는 상념을 불러 세운다 아직, 덜 피어난 억새의 손짓이 애처럽다 가을의 들녘이 아니면, 이렇게 불과(不過)의 시간으로 긴 여행을 다녀오는 소중(所重)한 시간(時間)은 어디에도 없다 방해(妨害) 받지 않는 혼자의 시간 몸과 마음을 하얗게 바래자 더러는 눈물로도 씻으며 꺼이꺼이 소리내어 울어도 좋으리라 무거운 흔적들은 모두 씻어내리자 그래서, 선하고 고운 영혼(靈魂)만으로 겨울로 떠날 준비를 하자 이 가을에 조용한 염원(念願)이다. 06090710. 邨 夫 .Ad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