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 그믐, 당신에게

당신을 알기까지 이렇게 오래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의 의미를 이제사 겨우 눈치채고 예순 번째 해 그믐에 서 있습니다.
곱게 빗질하던 머리며 팽팽히 당겨진 이마도
듬성듬성 갈라지고 뽑혔어도, 늘어지는 눈꺼플 사이로
당신에게서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경건(敬虔)을 배웁니다. 
지난 해 그믐이 어젠가 싶었는데, 오늘 다시 해 그믐이라 합니다.
움켜쥔 손도, 비밀스런 것도 풀어 보이라셨지요.
모든 걸 내려 놓으라셨지요. 
그리고, 당신께서 다 가져갔으면서
사랑도 하며 살았느냐는 눈 흘김은 
미어지는 가슴을 추스리는데 하루가 모자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슬픈 건
겉과 속이 예전 아니게 탈색(脫色)되고 낡아 가는 걸 
스스로 느껴지고 보아지는 것입니다.
끓는 냄비에 수재비 떠 넣듯, 그렇게 서둘러 가시며
회한(悔恨)은 놔두고 사랑만 퍼 가버리는 당신.....
아픔을 못 느낀지는 오랩니다 그냥, 총기만 남은 눈으로
당신께서 어딘지로 조용히 안내(案內)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어이하여 당신께선, 청춘도 정열도 앗아 가기만 하시는지.....  
우문(愚問)을 내놓고 우답(愚答)을 찾다가
근래에 읽다 남긴, 고승의 선문답(禪問答)이 떠올라
현답(賢答)은, 우문(愚問)이 깔고 앉아 있으면서 어디서 찿느냐고 
입적(入寂)에서 깨어나 일갈(一喝)하며 등뒤에서 후려치는 것 같습니다.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면, 남겨진 체온이 아깝고
꿈도 안꾸는 잠은 아까워서 
일어나 촛불을 켜고 기억을 꺼내어 가만히 불꽃너머에 세워봅니다.
만남이, 삶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일상(日常)이 끝나  대문 닫으면서는
아무도 내가 살아 있는지도 모를거란 불안감에
어둠이 밀려오기 전에 환하게 불을 밝혀 놓습니다.
하얀 동백 꽃다발을 문패 옆에 걸어두렵니다.
꼭, 해 그믐이면 살아나는 가물가물한 얼굴들이 
혹시나, 이 눈 속을 울먹이며 설움 겨운 추억들을 이고 지고 오느라 
낯익은 길도 헤매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老婆心)도 있지만.....
다들 귀향(歸鄕)하는 해 그믐 길....

누군가, 한라산 영실곰솔(靈室-松)처럼 왜 이리 삭았느냐고 펑펑 울어줄 사람
멱살을 잡고 다그쳐 줄 사람 없을까 하고 비록, 꿈일 망정 기다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앗아간 그, 아무 한가지만이라도
해 그믐일지, 세모인지에 떨구어주고 가시면 아니되겠는지요?                

06120712. 邨 夫  Ad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