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나방에게도 비망록이 있었다니 글 염괴 / 낭송 이재영 날 가져요. 오늘 오늘만큼은 최고의 쾌락을 지휘할 수 있도록 당신의 철저한 하인이 되겠어요. 당신만이 누릴 수 있는 고급 섹스를 바칠 겁니다 벌써 당신의 살빛 드레스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적셔놓았어요 온 몸에 흐르는 농염과 페르몬이 이렇게 한순간 남자를 하인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거로군요 왕비님이라고 불러도 되지요 날 지휘하는 사이 경험하게 될 모든 것들은, 해 지는 순간에 노을빛으로 한번만 흘겨봐 주면 끝나게 되어 있잖아요 물론 당신의 교성은 나의 몫으로 당신의 부는 호각소리에 유격대원이 될 테지만 말이에요 왕비님, 그동안 여성으로서 억울한 섹스가 무엇이었죠 레깅스나 팬티스타킹을 왕비님께만 신으라고 강요하던가요 왕비님의 그 창백한 입술에 키스도 안 해주고 스커트 속으로 손을 넣던가요 흠,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먹이를 주는 주인들의 옛이야기와 닮았군요 그래요. 우리는 황홀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스스로 명주를 감고 미이라가 되었었죠 금식의 선禪, 열이틀이 지나서야 겨우 고치를 깨고 나왔어요 그저, 왕비와 전사로 각자 우화된 생명으로 말이에요 바람, 바람이 필요해요. 바람을 타고 싶어요 날고 싶은 게 꿈이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워요 퍼득 퍼득, 젖은 날개로 오직 왕비님께만 다가갈 나래짓과 정성을 다할 섹스 한번 그게 나의 전부인 걸요 어떤 이의 가라사대 --너희에게 섭생의 법 처방할지니 뽕잎을 섬겨야 하느니라. 아항, 잊지 못할 우리들의 경전이죠 일생을 푸르게 살았으니 여한도 없어요 이제, 황혼녘까지 짜릿한 거사를 마치면 왕비님의 자궁에서 별들이 쏴르르 쏟아지고 겨울이 오기 전 주인님께 금침을 선사할 수 있을 거에요 서로에게 미쳐가며 처음 시작하는 마지막 섹스가 참, 근사하군요. 극 황홀 뒤 생을 접는 노을빛 기억은 꼭꼭, 담아갈 겁니다 왕비님의 하인으로 미쳐버리는 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에요 먹이를 주던 주인을 위해 미련 없이 우리, 비단신 한 켤레 벗어놓고 서역 먼 길 함께 떠나요 반짝 반짝 멀어지는 사이 사람들은 우리를 누에나방이라고 불러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