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환경 속에서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좀 더 쉬운 길’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쉽고 빠른 길이 아니라 힘들지만 ‘옳은 길’을 향해 자신을 던진다. 20세기 최고의 남극 탐험가로 알려진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Henry Shackleton)은 남극 탐헌선의 이름을 ‘인듀어런스(Endurance, 인내)’라고 지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바로 인내심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남극 탐험을 함께할 동료들을 뽑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내자 무려 5,000명이 신청서를 보내왔다. 그 광고문은 바로 이런 내용이었다.

   위험한 여행에 함께할 사람을 찾습니다. 급료는 적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추울 것이며 오랫동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어야 합니다.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무사히 돌아오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성공할 경우 대가는 명예와 인정뿐입니다.

   거의 협박조로 들리는 이 무시무시한 광고문에 많은 사람이 매혹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탐험가의 운명을 향한 순수한 도전정신에 감명받았던 게 아닐까. 이렇게 힘든 길임에도 ‘함께 가자’라고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그 절실함을, 이 오싹한 광고문 뒤에 숨은 용감한 탐험가의 진심을 읽어낸 게 아닐까.

   운명을 개척한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 뒤에 숨은 진정한 보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마로 ‘그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 자체다. 남극탐험대의 보수는 쥐꼬리만 했고, 누군가 칭찬을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남극탐험대의 일원’이라는 명예와 인정만이 그들이 원한 자부심이었다. 그렇게 순수하게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운명을 바꾸는 용기를 지닌 이들이다.


   프랑스의 작가 라퐁텐은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만단다. 인간은 가끔 자신이 피하려고 했던 바로 그 길 위에서 운명을 만난다고. ‘정말 이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라고 생각하던 그 일을 천직으로 삼게 되었다는 사람들 또한 많다.

   나 역시 그랬다. 글쓰기는 내가 너무 좋아하는 일이었기에 직업으로 삼기는 싫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직업이 되어버리면 그 열정과 순수가 퇴색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인생은 너무 짧아서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좋아하는 일 따로, 직업 따로가 되어버리면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소모되는 것이다. 지금은 너무도 잘 안다.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은 운명이었던 ‘작가의 길’이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운명이자, 내가 선택한 길이라는 것을.

   나도 20대에는 가끔 사주를 봤다. 도대체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잘할 수 있는지, 혹시 내 ‘운’이 너무 나쁜 것은 아닌지 궁금하고, 불안하고, 두려웠기에. 하지만 ‘정말 이것이 내 이야기다’라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사주는 더 이상 보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두려움 없이, 의심 없이, 후회 없이 추구하는 법을 배웠다.

   ‘내게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마음은 운명을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들이 나를 선택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결국 ‘타인의 스케줄’, ‘타인의 프로젝트’에 나를 맞추는 일이 되어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소식은 저 바깥에서 들려오지 않는다. 가장 아름다운 소식은 바로 내 안에서 들려온다. 진정으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면, 언젠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가장 상서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길을 갈 거야. 나는 후회 없이, 미련 없이, 두려움 없이 내 길을 걸어갈 거야.

   비스마르크의 말처럼 운명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운명에 먹히고, 운명에 도전하는 사람은 운명이 길을 비켜줄 것이다. 당신이 운명과의 한판 승부를 벌이기로 마음먹는다면, 그 결심을 진정으로 가로막는 것은 오직 당신 안의 두려움뿐일지니. 진정 용감한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환경조차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바꿀 줄 안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선택지는 매우 복잡해 보인다. 수백 가지 상품 중에 한 개를 고르라고 부추기는 것 같고, 수없이 많은 사람 중에 ‘딱 한 사람’을 골라 사랑하라고 독촉하는 것 같다. 하지만 선택의 깊은 본질은 의외로 이분법적이다. 계속 이렇게 살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 것인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살 것인가, 내 안의 깊은 열망의 길을 따를 것인가.

   우리가 이런 본질적인 선택을 망설이는 이유는 그 선택의 책임을 온전히 우리 자신이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임을 진다는 것은 곧 진정한 주체가 된다는 뜻이 아닌가. 그 선택의 길 위에서 발행하는 모든 결과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길 위에서 느낄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절망까지도 온전히 내 것이기에 오히려 더욱 자유로워진다.


   내가 느낀 깊은 행복은 하나같이 ‘쉽게 얻은 성취’가 아니라 ‘아주 어렵게,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얻은 것들’이 주는 지극히 복잡하고 미묘한 희열이었다. 어렵게 얻은 행복의 바로 앞에는 항상 엄청난 고통이 버티고 있었다.

   우리의 신생을 바꾸는 선택은 의외로 간단하다. 계속 지금처럼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길을 향해 나를 온전히 던져버릴 것인가 그 질문에 온 힘을 다해 망언이 없이 대답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올 것이다.

글 출처 : 그때, 나에게 미처하지 못한말(정여울, arte)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