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급여와 상반기 성과급을 받는 날, 텅 빈 통장에 여러 자리 숫자가 찍히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선물을 하기로 했죠.

   선물이라고 해봐야 서점에서 일고 싶은 책을 몇 권 사는 것이었지만 달달한 연애소설도 사고, 좋아하는 작가의 여행기도 사고, 일기장도 새로 사서 돌아오는 길이 참 좋았습니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던 시절의 설렘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책장에 새 책을 꽂아 놓고, 책 사이에 새로 사 온 일기장도 꽂아 두면서 그 자리에 있던 오래된 일기장은 빼냈습니다.

   오래된 일기장을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으려다가 이 일기장의 첫 장에는 어떤 것을 써놓았었지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펼쳐 본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일기를 쓰게 하고, 
언제라도 당신을 초대하고 싶어서 내 방을 매일 정돈하게 하고, 
세상의 여러 곳을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며,
누구에게든 화사하게 인사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활자 속에 숨겨진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품게 했으며,
당신에게로 갈 불행을
기꺼이 내가 다 막겠다고 기도하도록 만듭니다. 


   그를 열렬히 사랑하기 시작하던 때 쓴 일기였습니다.

   그때는 그랬었구나! 사랑이 지나간 지금 돌아보니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서먹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때 그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런 글을 다 썼을까? 마치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그녀는 옛 일기장을 바라보고 있었죠.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지겹도록 사랑했던 시절을 지나온 그녀에게 자주 생각나던 가사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옛 일기장을 서랍 깊은 곳에 넣으면서, 이런 시절이 언제 다시 올까, 노인 같은 심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평화를 포기했던 시절도 좋았지만
사랑 없이 평화롭고 지루한 요즘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새 일기장에 설레는 마음을 적는 날도 오겠죠.
만년필을 꾹꾹 눌러서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새기는 날도 오겠지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글출처 : 저녁에 당신에게(김미라, 책읽은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