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나무 하얀 꽃은 7월에 핍니다.

   쓰다듬어보고 싶을 만큼 매끄러운 살결을 가진 나무지만 벚꽃 만개하는 봄에 꽃이 핀다면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폭죽처럼 터지는 벚꽃의 화려함에 눌려 눈길을 끌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벚꽃이 주연이라면 노각나무는 엑스트라나 조연에 그치기 쉽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렇게 주연을 향해 가 있는 게 보통이지요.

   혹시 그 자리의 주연이 되지 않으면 슬며시 자리를 피해버리는 주인공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아니면 주연의 자리는 내 것이 아니라 여겨 자신의 이름이 불렸는데도 다른 사람이거니 하며 두리번거릴 뿐 앞으로 나서지 않는 조연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는지요.

   언제나 주연인 사람과 함께 일한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조연이 찾아오지만, 그들이 방문하는 목적은 언제나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함께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도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그에게 가 있었지요. 어디를 가든 주인공은 당연히 그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없는 공간에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를 찾아온 사람들이었지만 그는 없었고, 산책하기 좋은 뜰엔 노각나무 하얀 꽃이 동백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 꽃이 떨어지네요!”

   그동안 그를 찾아오던 사람 중에 꽃 떨어지는 걸 보고 아는 체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그를 만나고 나면 사람들은 꽃을 감상하기도 전에 배부분 자리를 떴기 때문입니다. 지리산에 자생하는 꽃나무가 서울 한복판에 떼 지어 서 있었지만, 그들 눈에 그 나무는 주인공의 배경에 서 있는 풍경일 뿐이었습니다. 곁에 있던 우리 또한 꽃나무와 다를 바 없는 배경으로 그의 뒤를 받치고 있었을 뿐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진 다음에야 배경이 눈에 들어오는 법입니다. 배경을 볼 수 있는 눈은 욕망이 자리를 비킨 뒤에야 생가는 법입니다. 그런 눈을 ‘연륜’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세월’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벚꽃이 화사하지만, 노각나무 흰 꽃과 피는 시기가 다르듯 조연이나 엑스트라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그 또한 우리가 인생에서 맡은 역할이 그런 것뿐입니다. 계절이 바뀌면 벚꽃이 지듯 인생의 역할 또한 고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무엇이건 나의 우주 속에서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의 주연입니다. 나 대신 아무도 내 인생을 살아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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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출처 : 이 별에 다시 올 수 있을까(김재진 산문집, 시와시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