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의 시인이신 김용택 선생님, 남들이 흔히 갖는 아호도 없으신 듯 이젠 섬진강 자체가 이름이 되신 선생님, 세상 모든 것들과 늘 연애할 준비가 되어 있는 푸른 마음의 소년 선생님, 분교 아이들이 언젠가 땅콩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지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모든 시들은 참으로 땅콩처럼 고소하고 감칠맛이 납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질리지 않고 그 실들을 영양가 많은 간식으로 먹는가 봅니다.

   언젠가 부산의 어느 다도회모임에서 선생님의 시(詩) <그 여자네 집>을 절절한 음성으로 낭송해 주던 여성을 잊지 못합니다. 그분은 자신이 마치 그 시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상기된 표정으로 시 안에 담긴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또 한번은 제가 주관하는 어느 모임에서 시 읽기를 하는데, 원래는 제 시를 읽기로 한 분이 양해를 구하면서 김용택의 시 한 편을 외우고 싶다더니 분량이 꽤 긴 <그 여자네 집>을 낭송하다 중간에 틀렸답니다. 그랬더니 글쎄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는 것이었어요. 주어진 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우리에게 그녀가 눈치 없이 반복해 읽었던 <그 여자네 집>을 저는 이래저래 잊을 수가 없답니다. 그 이후 저는 <그 여자네 집>을 혼자서 찬찬히 다시 읽었습니다. 그러고는 생각했지요. 이런 시를 쓰는 분은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만나기 전에도 저는 이미 선생님의 충실한 독자였음을 알고 계시지요? 글로만 알고 말로만 듣던 섬진강의 시인이 비로소 우리 수녀원에 나타났을 적에 다른 수녀님들도 모두 반색을 하였지요. 남원에서 산 것이라며 선물로 주신 나무 그릇은 아직도 잘 사용하고 있답니다. 언젠가의 방문길에서는 선물 받은 것이라면 물오징어도 두고 가셨는데 제가 간수를 잘 못해 조금밖에 먹을 수가 없었답니다. “아름답고 고운 것 보면 그대 생각납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내 사랑은 당신입니다……”로 시작되는 이지상 님이 작곡한 김용택의 시 노래에 반해 방송국에 수소문하여 악보를 전해 받은 일도 저에겐 고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어쩌다 섬진강을 지나거나 시골의 초등학교 분교를 지나거나 하면 늘 선생님 생각이 나곤 합니다. 평소에 연락도 자주 못하고 지내지만 앞으로는 종종 전화도 그리고 편지도 쓰고 그렇게 하려는데 괜찮을 지요? 부산에 올 일 있으면 우리 집에 놀러 오시고 하루 밤 머무시라는 말도 빈말이 아니랍니다. ‘살구꽃이 하얗게 날리는 집’ 그 여자가 백 명도 넘는 우리 집에 오시면 가슴이 뛸지도 몰라요. 수녀원 손님 실에 머무는 탓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각시와 할 수 없이 따로 잘 수밖에 없었다는 불평 섞인 푸념을 바람결에 전해 들었기에 다음에 오시면 침대 두 개를 하나로 모아 붙이고 풍선과 꽃으로 신혼부부 방처럼 멋지게 꾸며 드릴 테니 어서 오기만 하세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호호호, 상상만 해도 즐겁고 재미있네요.

……우리들에게 깨끗한 영혼을 불어넣어 주시는 수녀님과 이렇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뛴답니다. 우리 모두 수녀님을 사랑합니다. 수녀님을 풀꽃이시고, 저 쪽 맑고 깨끗하고 서늘한 하늘입니다. 우리들에게 늘 맑은 샘물을 주시는 수녀님.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어느 해 여름 빛바랜 원고지에 다정하게 써 보내신 편지의 한 구절을 읽으려니 제 가슴이 지금도 소녀처럼 뛰는군요.

누이야 날이 저문다
저뭄을 따라가며
소리 없이 저물어가는 강물을 보아라
풀꽃 한 송이가 쓸쓸히 웃으며
배고픈 마음을 기대오리라
그러면 다정히 내려다보며, 오 너는
눈이 젖어 있구나

방금 제가 좋아하는 시집 《누이야 날이 저문다》 안에 들어 있는 이 시를 읽고 나니 제가 진짜 누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청탁을 받고 글을 써야 하는데 어떻게 쓰면 되나요?” 하고 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전화하면 걱정을 했더니 껄껄 웃으며 편하게 적으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정말 편하게 적었는데 맘에 드실지 은근히 걱정입니다. 섬진강의 시인을 세상에 낳아 주신 그 훌륭하신 어머님께도 사랑과 평화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수녀복 입은 이들을 매우 신기해한다고 하셨지요? 눈이 아름다운 시인의 고운 짝에게도 물론 안부를 전하고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그 자리에 계심을 우리 모두 고마워합니다. 한결같은 정성으로 아이들과 동심으로 함께해 온 오랜 세월에도 축하를 드립니다. 이 땅의 사랑받는 시인으로 앞으로도 강물 같은 시들을 더 많이 써 주시길 바랍니다. 모두들 큰 도시를 선호하는 요즘, 촌에 사는 촌사람임을 스스로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 모습이 늘 존경스럽습니다. 섬진강도 말을 할 수 있다면 김용택이라는 시인을 큰 소리로 칭찬해 줄 거예요.

   어느 날 섬진강의 시인이 사는 그 정겹고 아름다운 마을에 제가 불쑥 찾아가 포근하고도 당당하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용택아, 밥 먹었니? 지금 나하고 저 노을진 강변을 거닐어 보지 않을래?” 그러면 “오매, 수녀님이 내게 시방 반말해 부렀네, 잉?” 하며 정답고 짠한 표정으로 웃으시겠지요?! 사랑합니다.
《어른아이 김용택》(문학동네, 2008)

글출처 :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해인 산문집,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