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들부들 떨리는 오른 손을 왼 손으로 잡아가며 가까스로 바늘을 1번 트랙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볼륨을 올려 보았다.
손은 볼륨 노브를 잡고 있었지만 눈은 카트리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지러워 정신을 잃을것 만 같았다.
그런데 이미 음악이 시작되어야 할 부분이 지났는데도 왠 일인지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게 아닌가?
아직 녹음된 부분이 아닌가......더 돌아가야 하나?........
아닌데?  볼륨을 올렸으니까 '스즈즈즈즈' 하는 소리라도 나야 되는거 아냐?
나는 셀랙터 노브를 튜너로, Aux로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래도 감감 무소식.........
카트리지 가까이 귀를 갖다 대자 음반에 파여있는 홈을 따라 춤추듯 트랙킹하는 바늘에서는


가늘지만 분명 음악 소리가 나고 있었다.
"흐~~음 신호는 들어 가는데 어째 소리가 안 날꼬..........?"
카트리지는 이미 1번 트랙의 중간 정도를 힘 차게 달리고 있었다.
여기쯤이 "하아~~~쁘래이커허~~~~캐애앤~~테이커~~~~" 거길 텐데......
나는 조용히 암을 들어 올려 고정장치에 올려놓고 음반을 꺼내어 들여다 보았다.
음반을 들여다 봐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그 LP 판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나는 판 위에 묻어있는 작은 먼지들을 털어내려고 후~욱 입김을 불었다.


그런데....아뿔싸!


그만 판에 침이 튀고 말았다.


나는 얼른 난닝구(메리야쓰 라구 하기도 하고...여하튼)자락을 당겨서 침 을


조심스레 닦았는데......이런 젠장!


닦이기는 커녕 얼룩이 더 커지는게 아닌가?


친구 녀석의 형이 눈치 채지 못하게 곱게 다시 갖다 놓아야 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판에 자욱을 없애고 나니 난 상당히 지쳐 있었다.


소리도 않나는 전축과 훔쳐온(?) 판 에 만든 흔적......


머릿 속이 복잡했다.


 


곰곰히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그전축을 물끄러미 쳐다 보다가 이윽고 그녀석을 벽에서 떼어놓고, 벽과 놈의 사이 틈으로 들어가 놈의 내장을 들여다 보았다.


들여다 보았어도 내게 무슨 방법이 있을리는 없었지만....그래도 난 혈기가 있었나보다.
천천히 일어나 방을 나선 나는 대문 옆에 있는 작은 창고로 들어갔다.
나는 아버지의 연장통을 뒤져 각종 드라이버와 펜치,니퍼,톱(?)등등으로 무장을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벽과 녀석의 틈 사이로 들어가 드라이버를 들고 작은 나사들을 풀기 시작했다.
좁은 틈새에서 작업하기가 힘들어지자 나는 방 한 가운데로 놈을 끌어내고는 웃통을 벗었다.
울지 못하는 독수리 한마리의 대 수술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아!........그 때부터 오디오와 나의 그 험난하고도 치열한 전쟁은 잔잔한 서막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뒷 판넬(이 녀석은 합판 같은걸 압착시켜 만든것으로 뒷 면에 회로도 같은게 그려져 있음)을 분리하자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전원은 이상이 없었으므로 기판에 꽂혀있는 6개의 진공관에선 용광로에서 흘러 내리는 쇳 물처럼 바알간 불빛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 진공관에서 나는 빛은 사람의 마음을 참 따뜻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보통 진공관 내부의 아래 쪽에 위치하는 히터에서는 붉은 빛이 나오고,윗 쪽에 위치한 플레이트에서는 파란 불빛이 나온다.
어두운 방안에서 진공관의 따사로운 불 빛을 쳐다보며 넷 킹콜(Nat King Cole)의' Nature Boy'를 듣고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평온 해지며
그 붉고 푸른 빛들이 나를 한 없이 아득한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같은 환상에 빠지곤 했었다.



다시, 작업으로 돌아가서 나는 우선 전기줄을 2미터쯤 잘라서 안테나를 만들어,


FM안테나 접속 단자에 물리고 세렉터를 튜너로 돌린다음 볼륨을 올려 보았다.
역시 이녀석은 묵묵 부답이다.
튜닝 노브를 잡고 주파수를 맞추어 보았다.
구형 라디오나 전축의 튜너부에는 동조 바리콘이라는 물건이 있는데,


요 놈을 돌릴때의 그 느낌은 돌려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아날로그와 장인정신이 빚어내는 정교함의 극치..........요즘의 터치식 튜너나 하이테크 제품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그런데 이눔의 독수리는 음악은 커녕 신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주먹구구식 조치를 총 동원하여 녀석을 달래도 보고 윽박질러도 보았지만 놈은 요지부동 이었다.
잠시 정리를 해보던 나는 내가 아직은 이녀석을 수술할 만한 실력이 안된다는걸 깨달았다.
작전상 후퇴.....................
그러나 나는 뒷 수습을 해야했다.



어머니가 내 방에서 아무소리도 나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 하실게 아닌가?


거금을 주고 사 온 전축이 소리도 나지 않는 고물이라면...이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번개같은 속도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머리 쓰는 일은 나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지만....
아마도 그 때는 지금보다는 좀 더 영악했던 것일까?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체나 다름없는 독수리 한 마리를 제 자리에 곱게 안치 시킨 후 안 방으로 갔다.
어머니께 "제 소원을 들어 주셔서 정말 너무나 감사드리며,오늘은 음악 안듣고 자기 전까지 공부를 하는걸로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을 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쳐다 보시더니 당신의 선택이 결코 헛 된것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하시는지 너무나도 흡족한 미소를지어 보이셨다.



.....이 보다 더 가증 스러울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