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단상/박형진


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쪽에 나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 녹아 내리는
추녀물을 세어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
봄이 잦아들었다.


*박형진 시인은 부안 모항에서 농사짓고 산다. 바닷가에 납작
하게 엎드려 있는 그의 집 처마 끝에 파도가 닿을 때도 있다.
눈을 녹이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작은 집 처마 밑에 앉아 한
손으로는 턱을 고이고, 나무막대기를 든 다른 한 손으로는 처
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물길을 내주고 있는 사람. 얼어붙
은 땅에 봄이오고, 길 낸 데로 물은 잘 흐르디? 천원짜리 한 장
없이도 한 겨울이 가던 그런 적막한 세월도 있었다.*

- 김용택이 사랑하는 시 "시가 내게로 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