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계단 글 아직도/낭송 김숙 못다한 마지막을 편지에 담아 이별의 비무장지대 우체국을 다시 찾았다 우체국엔 회한을 들고 온 사람들의 표정이 넥타이의 매듭처럼 처음부터 소멸해 있었고 일체의 종교를 가지지 못한 키 낮은 우체통은 하루의 사연도 이기질 못하고 거기서 또 그렇게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이것으로 우체국을 뒤로하고 돌아서다가 변명처럼 어쩌다 한번 돌아다 본 우체국 앞엔 이제는 자라지 않는 내 철 지난 옛 앨범들이 홀씨처럼 날리며 조용히 지워져 가는데 영문을 모르는 어린 새들은 햇살이 마냥 눈부시기만 했다 오늘도 편지를 실은 우체부의 낙엽 가방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잎새의 사연이 밤새 누군가의 눈물로 채워졌을 터이고 편지로도 다 지우지 못한 어느 바람의 사람은 돌아서는 우체부의 발자국이 채 식기도 전에 술잔 위에 쓰러져 아주 많이 나부낄 텐데 나는 두고 갈 그 무슨 혼돈이 두려워 이렇게 우체국 모퉁이를 다 돌아서지도 못하는 걸까 사람들은 각기 다른 얼굴로 와서는 층계마다 그리움을 하나 둘 놓고 가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엔 꽃보다 그리움이 더 많이 피어 있다 진정 그 그리움들은 애증을 섬기지 못하여 끝내는 우체국 계단에서만이 숨어서 숨어서 더 숨어서 피는 거지만 가장 우울한 편지는 언제나 되돌아오는 부메랑 편지가 아니고 혼자서만이 띄우는 편도선 편지도 아닌 담에야 오늘도 내일도 부치지 못한 고립의 편지 그러한 자리에서 그러한 편지를 쓸 때면 고독은 언제나 만년필 촉 끝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언젠가 만년필 촉매와 눈매가 허물어지는 우체통이 다 삼키지 못할 긴긴 고독의 편지를 쓰리라 우체통이 편지 봉투의 모서리보다 편지 안의 사연에 더 헐어버렸을 지라도 그리하여 멀리로 잊혀진 사람들에게 무너질 줄 모르는 험한 고독을 그리하여 어둠 안에서 섬기게 하리라 행여라도 고독을 모르는 이가 불시에 나의 애인이 되어 있다면 애인의 아무리 슬픈 이야기에도 나는 결코 슬퍼할 수 없을 것이고 정녕 슬퍼할 수 없음을 혼자서 또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타 들어가다가 우체국에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멍하니 혹은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데 아직도 돌아서지 못하는 까닭과 이제는 돌아서야 할 까닭이 자꾸만 속눈썹을 데우고 나서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이 마지막이 아닌 그리움이란 걸 알았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우체통을 혼자 두어선 안 되겠지만 오늘의 사연을 어제로 돌려놓아야 하는 사람과 오늘의 사연을 내일로 돌아서야 하는 사람의 제 5 계절 섭씨 0도의 고독한 자리를 위하여 이제 햇살이 눈치를 보며 우체국 문을 조금씩 닫는다 황홀한 이별을 협찬한 우체국이여 그 아픔을 챙겨준 우체통이여 한 사람을 더 사랑하지 못하고 한 사람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나의 비겁함을 탄식하며 오늘을 모르고 사는 그날까지 그러면 안녕! 그리고 안녕...... 훗날에 오늘을 이기지 못하는 술 취한 그러한 훗날에 내 손등에 우표를 붙이어 우체부에게 떼를 쓴다면 나는 어느 소망의 사람에게로 전송되어 밤이면 간절한 불면의 눈물로 읽혀질 수 있을까 누구든 뒷모습에 익숙해 질 무렵이면 가슴에 텅 빈 우체국을 하나 짓고 사는 거라고 돌아서는 발걸음마다 낙엽이 또 갈 데 없다 오늘도 사람들이 떨어뜨리고 간 베고니아 그리움이 슬픈 그림자에 말려 노랗게 익어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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