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 박 인 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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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감상 : 정끝별·시인]

  • 시냇물 같은 목소리로 낭송했던 가수 박인희의 '목마와 숙녀'를 옮겨 적던 소녀는
    이제 중년의 '여류' 시인이 되었다.
    '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쓴 버지니아 울프는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템스강에 뛰어들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 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하며'라는 유서를 남긴 채.
    '목마와 숙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페시미즘의 미래'라는 시어가 대변하듯
    6·25전쟁 이후의 황폐한 삶에 대한 절망과 허무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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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려한 외모로 명동 백작, 댄디 보이라 불렸던 박인환(1926~1956) 시인은
    모더니즘과 조니 워커와 럭키 스트라이크를 좋아했다.
    그는 이 시를 발표하고 5개월 후 세상을 떴다.
    시인 이상을 추모하며 연일 계속했던 과음이 원인이었다.
    이 시도 어쩐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일필휘지로 쓴 듯하다.
    목마를 타던 어린 소녀가 숙녀가 되고,
    목마는 숙녀를 버리고 방울 소리만 남긴 채 사라져버리고,
    소녀는 그 방울 소리를 추억하는 늙은 여류 작가가 되고….
    냉혹하게 '가고 오는' 세월이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로 요약되는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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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생명수를 달라며 요절했던 박인환의 생애와, 시냇물처럼 흘러가버린 박인희의 목소리와,
    이미 죽은 그를 향해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고 쓸 수밖에 없었던
    김수영의 애증을 이야기해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인 것을,
    우리의 시가 조금은 감상적이고 통속적인들 어떠랴.
    목마든 문학이든 인생이든 사랑의 진리든, 그 모든 것들이 떠나든 죽든,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바람에 쓰러지는 술병을 바라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모라면, 그렇게 외롭게 죽어 가는 것이 우리의 미래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