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가 마신 술들을 한 순간 토해낸다면
집 앞에 작은 또랑 하나를 이루리라
그 취기를 풀어 권태로운 211번지 주민들을
알 수 없는 슬픔과 열정으로 몰아가고
나는 빈 소줏병이 되었으면

혼이 빠져 나가듯 바람에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모아 뭉게구름을 만들면
우울증의 애인을 잠시 즐겁게 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웃는 애인 앞에서 구겨진 담뱃갑이 된다면

내가 읽어 온 책들의 활자를 풀어
벽촌의 싸락눈으로 내리게 하고
만남과 이별의 숱한 사연들을
가랑비로 내리게 한다면
그리고 속이 텅 빈 가을벌판의 허수아비가 된다면

주저하다 보내지 못했던
수많은 편지의 허리굽은 글씨들을
바로 펴 삼천리 금수강산을 그릴 수 있다면
북어 대가리같은 사유의 흔적만 남더라도
한결 가벼워진 몸을 쉽게 눕힐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누워 썩을 수 있다면
제 영혼은요
거름이 되고 공기가 되어서
우울에 지친 그대 어깨 위에 잠시 머물고
잠시 머물며 썩어 거름이 되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썩기 위해 우울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고
한없이 깊은 어느곳으로 스며들 것입니다

글/정해종

♪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 낭송 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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