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에도 명동은 서울에서 가장 번화가였으며 문화의 거리였지만 그 후 광복과 6 · 25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도 여전히 명동은 서울의, 아니 한국의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광복의 환희와 전후의 허무와 「페이소스」가 흐르던 이 거리에서 한국의 문화인들은 명동거리의 다방과 술집 등에 모여 실존주의철학을 논하고, 「니힐리즘」을 논하고 예술과 인생을 토론하며 불운했던 시대의 한과 정을 풀었던 거리가 바로 흘러간 시대의 명동거리였다.

비록 주머니는 텅빈 예술가이지만 기개(氣槪)만은 높아 하늘을 찌를 듯 하였던 사람들이 모였던 낭만의 거리가 명동이었다.
지금은 소비문화의 중심지, 환락의 거리, 지분(脂粉) 냄새가 가득한 거리로 변해버린 명동이어서 그 당시 명동거리에 정과 한을 쏟았던 명동파(明洞派) 문화인들의 발자취는 지금 거의 찾을 길 없지만 전설같은 추억담만은 아직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먼저 이 격동기의 시대, 명동의 풍속도를 다방에 촛점을 맞추어 자료와 명동파 인물들의 일화(逸話)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명동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속칭 명동의 샹송
「세월이 가면」의 작사자인 박인환(朴寅煥)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면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무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1956년 이른 봄 「동방싸롱」앞 빈대떡집에서 박인환이 작사하고 이진섭(李眞燮)이 작곡, 임만섭(林萬燮)이 노래불러 즉흥으로 만들어진 「명동샹송」은 이 후에 사람들 입에 회자(膾炙)되어 명동의 노래가 되다시피 하였지만 그 외에도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고 시작되는 「목마와 숙녀」라는 유명한 시를 남기고 30세의 한창 나이에 그가 사랑하던 거리에서 통음(痛飮)끝에 그의 싯귀절처럼 술병처럼 쓰러져버린 시인 박인환!
그의 일화는 아직도 명동거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다.

다음으로 명동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명동시장(明洞市長)」「명동백작(明洞伯爵)」이란 애칭으로 불리었던 소설가 이봉구(李鳳九)이다.
명동으로도 문화예술인들에 의하여 빛나던 황금시대에 이봉구는 명동거리에 젊음을 묻어버린 말하자면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명동을 사랑하여 그곳에서 살다시피 한 인물이 한 두명이 아니겠지만 그처럼 명동에 애착을 갖고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기에 「명동백작」이니 「명동시장」이니 하는 애칭이 생겼을 것이다.
그가 1966년에 발표한 『그리운 이름따라―명동20년』(유신문화사)에서 그는 흘러간 시대의 인물들과 거리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서문(序文)에서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는

문인(文人) 예술가들은 항상 이곳에서 기염(氣焰)을 토로하면서 새로운 문학과 음악, 미술, 연극을 구상했던 것이다. 당시 이봉구형은 언제나 명동카페나 주점에 앉아서, 또는 문인 예술가와 단란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만길 기염을 얌전하게 토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에게 명동시장의 호칭을 보냈던 것이다. 이제 지난 날 명동시장이 그 치내(治內)에 있었던 명동20년사를 친히 썼으니 다시 더 말할 나위가 없는 명동사(明洞史)가 될 것이다.

또 「명동백작」이란 애칭의 유래도 유명한 일이다.
6 · 25전쟁 당시 그가 부산에 피난살이 할 때 부산일보에다 무대에서 쓰러져 죽은 프랑스의 배우 「루이 · 쥬베」의 추도사를 쓴 적이 있는데 이 글에서「룸펜굴(窟)」이란 영화에 몰락한 남작(男爵)으로 출연한 「루이 · 쥬베」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폐허가 된 파리의 뒷골목 룸펜들의 소굴에서 헤매는 그대는 최후의 남작이여! 나도 명동에서 밀려나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는 신세이니 그대와 나는 같은 신세로다」
라고 썼는데, 이글을 연유로 하여 그의 벗들이 “남작이 뭐냐 백작해라”하고 농담삼아 붙여준 것이 일화가 되어 사람들 입에 회자(膾炙)된 것이다.
이렇게 명동거리에 인생을 묻었던 이봉구도 1960년 초에 변해가는 명동이 세태에는 어쩔수 없었던지 아니면 친구들이 모두 떠난 명동이 낯설어서였던지 이런 말을 남기고 명동거리를 떠나 버렸다.

가는 길 오는 길, 쉬는 곳 머무는 곳이 거의 같아서 자주 만나던 우리의 명동파들은 60년초 우리들의 명동이 막을 내림과 동시에 명동을 떠나게 된다.

다음으로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의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위의 『명동 20년』에 공초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청춘이다 청춘, 멋지고 흥겨워야지.」  카운터 위에 올라 기염을 토하는 두사람을 향해 공초는 젊음이 부럽다고, 술잔을 높이들어 찬사를 보내고 다시 담배를 피워물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선생님, 술은 못하시면서도」「포엠」의 마담은 담배 두갑을 사다 공초에게 선사한 후 잊지 않고 찾아오는 그 정이 고마워 인사를 올리면 「여기를 한번 다녀가면 그래도 파적(破寂)이 되니까 오지, 가족들과 즐기다 가는 것 같아서」 쓸쓸한 미소가 입가에 잠시 감돌다 또 눈을 감는 것이었다.


술을 못하여 주로 「청동다방」등에 출입하던 그와 『명정(酩酊) 40년』으로 유명한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는 같은 해 나란히 사파(娑婆)를 떠 “수주 가고, 또 공초가 가고”라는 무상(無常)이 가득 찬 말 속에 명동은 흘러갔다.
시인 조병화(趙炳華)도 명동을 사랑하여 “명동 인생천리 허허한 골목에 주점의 불꽃만이 늘어간다 잘잘잘! 인간의 기름이 닳도록!”이라고 읊으며 거리를 돌아다녔고 또 「포엠」에 대하여는 이렇게 썼다.


「퇴계로에 「포엠」이라는 술집이 생겼읍니다. 저녁이 오면 하루의 일과를 마친 저녁이 오면 병들어 앙상한 가로수 잎사귀를 돌아
우리들은 술을 마시러 「포엠」으로 갑니다. (중략) 그림쟁이들이 먼저 모여 들었읍니다. 그리고 글쟁이들이 모여들었읍니다. 그림쟁이와 글쟁이와 노래쟁이들이 같이 취해서 노랑저고리를 웃기다가 돌아들 가곤 했읍니다. (략)」


이상과 같이 명동파들의 일화를 중심으로 명동의 풍속도를 그려 보았지만 지면상 줄이기로 하고 본론인 다방의 변천에 대하여 계속 기술해 나가기로 한다.


 광복이 되면서 일제 때에 있던 명동의 다방들은 일단 문을 닫고 약간의 변화를 거쳐 다시 문을 열게된다.
그전에 그 거리에서 다방을 열었던 마담에 의해서 고전음악전문의 「봉선화(鳳仙花)」다방이 첫 테이프를 끊고 이어서 「리버티」「삼일(三一)」「에덴」이 생기기 시작하여 명동거리는 다시 다방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이어 손소희(孫素熙) · 전숙희(田淑禧) · 유부용(劉芙蓉)의 세 여인이 「마돈나」를 개업하여 이채를 띠었는데 이 다방에 김동리(金東里) · 조연현(趙演鉉) · 김송(金松)을 비롯한 문협인(文協人)들이 모였고 김광주(金光州) · 이용악(李庸岳)도 즐겨 드나들었다.
「마돈나」에 이어 「남강」「미네르바」「오아시스」「고향」이 문을 열었고, 「에덴」 옆에는 김광조(金光祚)부부가 「라아뿌룸」을 열어 이계원(李啓元) · 윤길구(尹吉九) · 이진섭(李眞燮) · 강문수(姜文秀)를 비롯한 방송인들이 모여들었고, 김연실(金蓮實)이 「낙랑(樂浪)」을 열어 옛 향수따라 손님이 모여 들었다.
또 소공동에서 「하루삥」을 하던 장만영(張萬榮)이 충무로(忠武路)에「비엔나」라는 다방문을 열었다.
다방안 정면에서는 조병화의 유화(油畵)가 걸려 있었고 김기림(金起林) · 김용호(金容浩) · 김경린(金璟麟) · 선우휘(鮮于輝) · 승정균(承鼎均) · 김광균(金光均) · 김병욱(金秉旭) 등이 모였으며, 「휘가로」에는 전봉래(全鳳來) · 김수영(金洙暎) 등이 눌러 살다시피 하였다.
또한 일제 때부터 서울역 앞에 있던 명곡다방(名曲茶房)인 「돌체」가 명동 한복판으로 진출하여 음악광들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이 시기 즉, 1947년이 명동으로는 황금시기였다.
「돌체」「휘가로」를 비롯하여 「무궁원」「명동장」의 주점에는 명동의 순수파들로 연일밤 터져날듯 대성황이었다.
오상순 · 서정주(徐廷柱) · 김광주 · 조지훈(趙芝薰) · 김동리 · 구상(具常) · 임긍재(林肯載) · 김초향(金草鄕) · 임서하(任西河) · 김중희(金重熙) · 최봉식(崔鳳植) · 김진수(金鎭壽) · 김병욱 · 김수영 · 임호권(林虎權) · 조연현 · 김창수(金彰洙) · 고병순(高炳舜) · 고흥상(高興相) · 김종윤(金鍾潤) · 조덕송(趙德松) · 최기덕(崔起德) · 임광빈(林光彬) · 최금동(崔琴桐) · 김정한(金定漢) · 최병욱(崔炳郁) · 김진기(金鎭岐) · 박고석(朴古石) · 손응성(孫應星) · 정전여(鄭銓汝) · 조병화 · 이진섭 등이 드나들었다.
6 · 25전쟁 직전까지는 「문예싸롱」과 「모나리자」「낙랑」「담담」 등이 유명다방이었고 「명동장」「무궁원」「백화정」「딱총집」「동해루」「동순루」등의 음식점도 명동파의 아지트였다.

그러나 6 · 25전쟁이 발발하고 9 · 28수복, 1· 4후퇴 등의 와중(渦中)에서 환도 후의 명동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잡초만 무성한 곳으로 변해 버렸다.
이 폐허 속에 봄이 오자 대구로 피난갔던 「모나리자」가 제일 먼저 문을 열었고 이어 「신한(新韓)」「올림피아」등이 문을 열어 「상해(上海)에서 돌아온 리루」라는 당시 유행하던 음악 속에서 다시 만나는 재회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어 코주부 김용환(金龍煥)부부가 「금붕어」를, 또 「돌체」가 다시 열려 다시 얼마간 명동은 활기를 띠게 된다.
1955년에는「동방싸롱」이 문을 열어 명동의 1950년대 후반기를 풍미하게 되었다.
한때 문단(文壇)은 「모나리자」파, 「문예싸롱」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모나리자파는 제각기 하나의 비조직성의 문인 예술가들이고 다른 싸롱그룹과는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었는데 이 「모나리자」파가 이 「동방싸롱」으로 대거 이동을 해 온 것이다.
문인들 외에도 김승호(金勝鎬) · 주선태(朱善泰) · 최남현(崔南鉉) · 장민호(張民虎) · 김동원(金東園) · 이해랑(李海浪) · 박암(朴岩) · 유치진(柳致眞) 등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상으로 살펴보아 알수 있듯이 이런 시대에 명동은 서울의 문화예술의 중심을 이루었고 그리고 다방은 이 명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기(知己)끼리 모여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쉬는 장소로서의 기능에서 머물지 않고 훨씬 적극적으로 명동의 문화를 이끌어 갔다. 즉, 다방에서 음악회, 그림 및 사진전시회가 열렸고 시낭송회 문학토론회 등의 문학행사도 열렸고 때로는 연극무대와 영화관이 되기도 하였고 기타 동창회, 간담회 등이 열리기도 하는 등 음악 · 미술 · 문학 · 사진 · 연극 등의 모든 문화예술의 무대로써 「종합예술(綜合藝術)의 장(場)」으로서 활용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자료에 의하여 다방의 이런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조사 · 분석 · 열거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1945년∼1961년 사이에 확인된 것에 한함. 명은 명동, 충은 충무로의 약칭
)

· 초원(草苑)다방(명) 김동석(金東錫)의 시집 『해변의 시』의 출판기념회,문학가동맹소설부(文學家同盟小說部)의 소설간담회
· 올림픽다방(충) 오장환(吳章煥)의 시집 『병든 서울』출판기념회
· 휘가로다방(명) 해군종군화가(海軍從軍畵家) 「양달석 개인전」 김혁림(金赫林) 회화전 한국음악가협회의 종합음악대연주회의 회원권 예매장소 한국작곡가협회의 동남아세아 음악대회에 참석하는 김세형(金世炯) 환송회
· 담수(淡水)다방(명) 나운영(羅運榮)작곡집 『다윗의 노래』출판기념회 「덴마크 음악과 영화의 밤」정말(丁抹)(덴마크)서 보내온 레코드와 필름으로… 오영진(吳泳鎭)의 미국 영화연극계 시찰보고강연회
· 돌체다방(명) 국제오페라협회 정기(토요) 레코드감상회 「쇼팡의 밤」「하이든의 밤」「춘희」「브람스의 밤」외 28회 서울법대졸업생음악회 김소영(金昭影) 「새로운 언어」의 출판기념회와 양주동(梁柱東)의 「문학강연회」
· 춘초(春初)다방(명) 고(故) 홍난파(洪蘭坡)의 추도회
· 월궁(月宮)다방(명) 「국제 Pen 클럽 한국센타」에서 주최하는 「문학의 밤」―사회 이하윤(異河潤) 현 국내시의 조류(潮流):김광섭(金光燮) 헤밍웨이론:조용만(趙容萬) 자작시 낭독:변영로 역사소설의 방향:김기진(金基鎭) 고전문학의 현대적 의의:양주동
· 목동다방(명) 나운영의 『반주법』출판기념회
· 대도회(大都會)다방(충) 서라벌예대「문학의 밤」
· 산유화(山有花)다방(충) 김명순(金明順) 수예전
· 청동(靑銅)다방(명) 국제극예술협회(國際劇藝術協會)(ITI) 년차대회와 오영진의 환영회
· 레인보(충) 일본대학 예술과동창회
· 담담(淡淡)다방(명) 극작가 유치진의 사극집(史劇集) 『자명고(自鳴鼓)』출판기념회
· 봉선화(명) 「해양문화사」주최 해양시화전(海洋詩畵展)
· 미림(美林)다방(충) 「우시회」주최로 제14회 「시의 밤」
· 무명(無名)다방(명)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에서는 고의동(高義東)회장의 도미(渡美)환송회
· 모나리자(명) 조선일보사 주최로 김청풍(金淸風)화백(畵伯)의 소품전
· 문예싸롱(명) 사파동인(娑婆同人) 시화전
· 마돈나다방(명)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의 시나리오집 『여학생』 『희망』출판기념회

이상으로 문화행사를 중심으로 하여 정리해 보았지만 이외에도 이름있는 다방은 많았다.
명동거리에는 「청산(靑山)」「청탑(靑塔)」「은하수」「비너스다방」「라쁘륨다방」「에덴다방」「낙랑다방」「칼멘다방」「갈채다방」「오아시스(전원)다방」「대성다방」「몽블랑다방」「고향」「삼화다방」「시온다방」「백구다방」 등등이,
충무로에는 「뷔엔나다방」「동화다방」「미림다방」「무선회관」등이 유명하였고 싸롱 · 그릴 등에서도 끽다부(喫茶部)가 따로 있어서 다방과
같은 기능을 대행하였다.

「동방싸롱」「문예싸롱」은 너무나 유명하였고 「지미그릴」「성하그릴」「싸롱 보아그랑」도 명동의 명물이었다.


다음으로는 명동의 근처 즉 소공동(小公洞) · 남대문로(南大門路) · 을지로1가의 다방에 대하여도 살펴보기로 한다.
주로 관청 · 은행 · 호텔 등과 경향신문(京鄕新聞) · 서울치대 등이 몰려있는 이 거리도 1950년대 문화의 집결지였고 다방 또한 이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유명한 다방들과 거기서 벌어졌던 문화행사등을 자료를 통해 정리해 본다.(소는 소공동, 을은 을지로1가)

· 푸라워다방(소) 3년전 일본복강형무소(福岡刑務所)에서 옥사한 윤동주(尹東柱)와 송몽규의 추도회(연희전문주최)서정주(徐廷柱)의 시집 출판기념회 모윤숙(毛允淑)여사의 출판기념회  방기환(方基煥)의 『손목잡고』출판기념회 발기인은 이헌구(李軒求), 박목월(朴木月)외 20명. 월남용사 최상덕 환영회 조대(早大)동창 송별회 박신영(朴臣影)의 시집 『바다의 합창』출판기념회
· 은전다방(소) 이창(李昌)「제3회 작품전」
· 올림피아(을) 재경산업미술가협회(在京産業美術家協會) 주최 국내산업건설에 대한 주제로 한홍택(韓弘澤) 개인전 이수억(李壽億) 유화전
· 칠보(七寶)다방(소) 이병주(李丙疇)『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 출판기념회
· 양춘(陽春)다방(소) 이경림의『주석(註釋) 석보상절(釋譜詳節)』 출판기념회
· 동명그릴(소) 박경리(朴景利)의 장편소설 『표류도』출판기념회
· 치대그릴(소) 서울상대 동창회 박익수의 『과학철학(科學哲學)』출판기념회 양명문의 시집『화성인(火星人)』의 출판기념회(오상순 박종화 이헌구 등의 발기) 조성식의 『고등영문법』출판기념회

이외에도 「봉선화다방」「대지(大地)다방」「가로수」「감로수(甘露水)다방」「하루빈」「낙천(樂天)다방」「화이다방」「모니카다방」등이 있었다.


[ 출처 : "서울육백년사"에 있는 내용을 제목과 내용을 읽기 편하게 약간 변형하여 올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