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야간 통행 금지


'0시의 사이렌'이 울리면 술꾼과 연인들은…

"세상 많이 좋아졌어. 앞으로는 곱쟁이로 살게 됐으니 말여. 그동안은 말로만 하루 이십사 시간이었지. 우리가 실지로 쓴 시간은 하루 스무 시간밖에 더 됐나. 그것도 숫적으로 스무 시간이지 게서 잠잔 시간을 제해 봐…." 이문구의 '산 넘어 남촌'에서 노름꾼 심씨는 늘 통금에 쫓겨 끗발 오를 만하면 아쉽게 일어서야 했던 터라, 야간통행금지 해제에 대한 소감이 남다르다. 옆에서 거드는 한 마디. "그렇구먼그려. 전반 삼십여 년은 일제에 묶이고 후반 삼십여 년은 통금에 묶여 반만 살았으니, 늙바탕이지만 이제부터라도 온새미로 살아야 하고말구."

1945년 9월 미군정 포고령 제1호에 따라 치안과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서울과 인천을 대상으로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1954년 4월에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통행이 금지되었다. 1961년에는 통행금지시간이 자정에서 새벽 4시로 축소되었고 1964년에는 제주도, 1965년에는 충청북도가 통금지역에서 제외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야간통행금지 제도는 계속 유지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것은 88올림픽 유치 직후인 1982년 1월 5일의 일이었다(
행정안전부, '야간 통행금지 해제에 관한 보고').
밤 12시가 되면 '애~앵~' 하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서대문 로터리에는 철제 바리케이드가 놓이고, 골목에는 2인 1조 야경꾼들이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며 '통금!'이라고 길게 소리친다. 술꾼들은 여관으로 옮겨 술자리를 이어가거나 아예 술집 문을 닫고 안에서 밤새도록 마셨다. 짧게 마시고 빨리 취해야 한다는, 한국의 음주문화에 드리워진 강박적 무의식은 통금 탓이 아닐지.

통금에 걸리면 파출소를 거쳐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문다. 통금에 걸린 아들을 벌금 내고 풀어준 뒤 아들에게 두부를 먹이는 웃지 못할 장면이 벌어지기도 했던 그 시절이다. 그러나 성탄절 전야와 12월 31일 제야(除夜)에는 통금이 해제되어 간만에 밤을 온전하게 만끽할 수 있었다.

"네온불이 쓸쓸하게 꺼져가는 삼거리 / 이별 앞에 너와 나는 / 한없이 울었다 / 추억만 남겨놓은 젊은 날의 불장난 / 원점으로 돌아가는 0시처럼." 가수 배호의 '0시의 이별'(1971)에는 통금과 함께 불 꺼지는 거리 풍경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갈마들며 잘 나타난다. 하지만 새벽 4시 통금 해제될 때까지 시간 보낼 수 있는 새벽다방을 이용한 연인들도 많았을 듯. 이후 '0시의 이별'은 금지곡 반열에 오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녀가 0시(밤 12시)에 헤어진다면, 그건 바로 통행금지 위반이며 정부 시책을 거스르는 행동이기 때문이라는 것. '11시30분의 이별'이라 했다면 괜찮았을까?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정의송 - 영시의 이별

출처 : 조선일보 200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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