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빵집


단팥빵과 우유 앞에 놓고 설레던 미팅

한 조각 빵이 근심하며 먹는 잔칫상보다 낫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이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사랑은 잼처럼 달콤하지만 빵 없이 잼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이런 명언명구들로 볼 때 빵은 빵 이상이다.

'빵집 그 이상의 빵집'으로 궁핍의 시대에 선망의 눈길을 모았던 빵집이 있다. 제과명장이자 제과업체 회장 김영모(55)씨는 다니던 초등학교 앞 빵집 진열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 허기를 달랬고, 빵 부스러기 하나라도 얻어먹는 날이면 그 환상적인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사랑이 꽃피는 빵집, 일명 '얄개시대' 빵집도 있다. 단팥빵, 소보로빵, 크림빵과 우유나 엽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수줍게 맞은편을 힐끔거리는 교복 입은 여고생과 남고생들. 사실상 금지된 남녀학생 간 미팅이 어느 정도 공공연하게 그러나 눈치 보며 이루어지던 곳. 탈선(?)이 있으면 단속도 있는 법. 암행 감찰에 나선 선생님에게 들켜 학교·학년·반 그리고 이름을 대야 했던 불운한 청춘도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의 무늬 속에 빵집 하나가 각별하게 새겨지는 일도 없지 않다. 시인 이시영은 '리치몬드 제과점'에서 "지금도 리치몬드를 생각하면 첫사랑의 애인처럼 달콤한 군침이 돈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출근길에 "오븐에서 막 첫 과자를 꺼낸 듯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골목을 올랐고, 누가 전화를 하면 "달뜬 음성으로 거기 마포서 옆 리치몬드에서 기다리라 해놓고 부리나케 달려 내려가곤" 했으니, 그 출근처란 마포경찰서 근처에 있던 창작과비평사였다.
각자가 기억하는 대표적인 빵집 이름은 각자가 속한 세대의 기억이다. 일제강점기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당이 주류였다. 1945년에 창업한 태극당과 고려당, 그리고 1947년에 창업한 영일당(크라운제과 전신)이 대표적. 이 시기에 창업한 빵집으로는 뉴욕제과(1945)와 독일빵집(1952)도 있다. 60년대 말부터 ○○당, ○○제과, ○○빵집 등이 각축을 벌이다가 70년대에 들어와 외래어가 유행했으며, 80년대에는 ○○제과가 대세였고 90년대 이후 베이커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도회지 웬만한 동네마다 하나쯤 있었던 독립 제과점은 프랜차이즈 제과점에 밀려 이제 매우 드물다. 김천 역전사거리 뉴욕제과점 막내아들 김연수가 자전적 단편 '뉴욕제과점'(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전하는 그 쇠락의 정황이 사뭇 긴 여운을 남긴다.

"뉴욕제과점은 우리 삼남매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필요한 돈과 어머니 수술비와 병원비와 약값만을 만들어내고는 그 생명을 마감할 처지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며칠에 한 번씩 팔지 못해서 상한 빵들을 검은색 봉투에 넣어 쓰레기와 함께 내다버리고는 했다. 예전에는 막내아들에게도 빵을 주지 않던 분이었는데,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것이었던가?"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이선희-아 옛날이여

출처 : 조선일보 200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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