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월급봉투


이것저것 제하면 남는 건 빈 봉투

"가불하는 재미로 출근하다가 월급날은 남몰래 쓸쓸해진다. 이것저것 제하면 남는 건 남는 건 빈 봉투. 한숨으로 봉투 속을 채워나 볼까. 외상술을 마시면서 큰소리치고, 월급날은 혼자서 가슴을 친다. 요리조리 빼앗기면 남는 건 남는 건 빈 봉투. 어떡하면 집사람을 위로해줄까."

월급쟁이의 애환을 노래한 최희준의 '월급봉투'(1964)다. 누런 봉투에 손으로 쓴 월급명세가 적혀 있고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린다'는 문구가 찍힌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현찰. 가불이나 외상값이 많지 않다면 월급날 퇴근 발걸음만큼 가벼운 게 또 있을까. 그러나 월급날 한 잔의 유혹은 즐겁고도 치명적이었으니, 외상값 갚으러 술집 갔다가 다음 달치 외상을 지기 일쑤였다.

가장들은 월급날 저녁 밥상의 반찬 가짓수를 기대해도 좋았다.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를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그날 유독 공손하고 우렁찼다. 아내에게 월급봉투를 건넬 때의 뿌듯함이란. 그러나 내색하기 힘든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명세표와 돈을 꼼꼼히 대조하는 알뜰한 아내를 어떻게 속인다? 월급봉투 하나를 더 구하거나 해서 명세표를 위조할 수만 있다면. 학창 시절 성적통지표 조작으로 조작의 역사를 마감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아!

첫 직장에서 처음 받은 월급봉투는 월급봉투 그 이상이었다. 부모님께 빨간 내복도 사드리고 동생에게 용돈도 쥐어주고 애인과 영화라도 한 편보다 보면 금방 바닥나는 쥐꼬리 월급이었지만, 마음만은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첫 월급봉투는 사회인으로서 제 앞가림 겨우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월급날 귀가 만원버스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했다. 은행에서 월급을 위한 현금을 인출해가는 경리직원을 노린 날치기 사건도 종종 있었다.

월급봉투의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은행들이 온라인 전산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한 1980년대 초라고 한다. 중소 제조업체들 상당수는 이후로도 월급봉투를 유지했지만, 주거래 은행의 압박성(?) 권유를 이기지는 못했다. 군 장병들의 월급도 중앙경리단에서 각급 부대를 거쳐 월급봉투에 담아 지급하던 것에서, 2006년부터 곧바로 장병 개인 온라인 계좌로 입금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1957년부터 44년을 봉직하며 받은 월급봉투와 급여명세서를 빠짐없이 모아두었다는 김민수 명예교수. 이 노학자에게 월급봉투는 무엇일까? 그것은 월급봉투에 적힌 액수의 가치로 결코 환원시킬 수 없는 삶의 곡절과 영욕과 흘린 땀과 그 밖의 또 다른 소중한 그 무엇이리라. 최희준의 '월급봉투'가 겪은 운명을 빼먹을 뻔했다. 심의에 걸려 노래가 나온 지 1년 뒤에 금지에 묶이고 말았으니 이유인 즉, '남한 인민들이 이렇게 못산다'는 식으로 북한에 이용당할 소지가 있다는 것. 월급봉투도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였다.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월급봉투 - 최희준

출처 : 조선일보 200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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