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

 

  - 더위를 식히는 겨울 이야기 "기다림"

 

    하얗게 눈이 내렸습니다.

 

  눈 속에 나무들이 빛나고 있습니다. 손바닥으로 문지른 만큼만 내다뵈는 창 밖이 답답해

 

  빗장 걸린 나무문을 밀어 봅니다

  웬만큼 밀어봐도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문 밖에 가득 눈이  쌓였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물을 받아 문틈으로 흘려 보내고 난뒤

  비로소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 하는 문이  그러나 밉지만은 않습니다.

 

  누군가 장난을 치듯 문짝 뒤에 숨어 있는 것만 같아 내 마음은 오히려 은근한 기대로

 

  부풀기 까지 합니다

  바깐엔 그러나 아무도 없습니다

 

  장난을 할 누구가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닙니다.

 

  길은 끊켰고, 무릎까지 눈이 덮여 아무나 올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세상이 온통 마법에 걸린 듯 하얗기만 한데 눈부셔서 라도 아무나 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깨 가득 눈을 이고 있는 나무들이 무겁게 보여 가지를 흔들어보면, 차갑습니다.

 

  목덜미 속으로 들어간 눈이 체온에 녹아 미지근해질 때까지 우리가 견뎌야 할 차가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눈더미에 놀라 새 몇 마리가 푸르르, 산 위로 날아가고 맙니다.

 

    어디서 잠잤을까, 쟤들은? 밤새 퍼뭇던 눈발 속에서 어디서 잤을까, 새들은?

 

          " 우리야 다 자는 데가 있지. "

 

    그 순간 누가 작은 소리로 대답을 합니다.

 

  놀란 나는 어리둥절 주위를 둘러봅니다.   주위엔 물론 아무도 없습니다.

 

  입 다문 채 서 있는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잎 다 떨군 백양나무 나목들 뒤로

 

  아름다운 엽서 같은 침엽수들이 우두커니 서 있을 뿐입니다.

 

       - 또 착각을 한 거군.   내 마음의 소리 말야...... .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삽과 빗자루를 찾습니다.

 

      이곳에 살면서부터 자주 반복되는 일입니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 사노라면 마음이 마음에게

 

  자주 말을 걸어오나 봅니다.

 

  독백하듯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독백이 끊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뒷말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 아무도 없잖아.   그만 눈이나 치워!

 

    눈을 치우고, 마당에 세워놓은 도끼를 드는 순간 새파란 하늘 향해 한 줄기 빛이 화살같이 빠르게 달아납니다.

 

    햇빛에 반사된 도끼 날이 맑디맑은 공기 속으로 날카로운 빛 하나를 쏘아올린 것입니다.

 

    씌워뒀던 비닐을 벗겨내고 마른 장작개비들을 운반합니다.

 

    잘게 쏘갠 장작은 곧 불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나 봅니다.  

 

    울타리 바깥까지 치워놓은 길도 기다림 때문에

 

    그랬던가 봅니다.  

 

    눈 덮인 언덕 아래는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햇빛에 온몸 뒤채며 바람과 만난 강은 커다란 소리로 노래 부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울타리 앞에 서서 발끝만 세워도 나는 바람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누군가를 기다려봐.   기다린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니까. "

 

           바람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지.   물을 끓이고 찻잔을 준비하는

 

          그 시간을 생각해 봐.   주전자엔 김이 오르고, 싸늘하던 유리창은 곧 뿌옇게

  

          흐려지지.   차 향기가 가득해질 방안에 앉아 옛날 일 생각 하는, 그런 시간이란 생각만 해도

 

          가슴 따뜻해.   물이끊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은 조금씩 지난날의 사랑을 훈훈 해져가고...... "

 

   지붕에 앉아 있지 바람은 지금 젖어 있습니다.   강을 건너오다 젖어버린 바람의 날개, 바람을다 떠나보낸

 

   강은 이제 호수처럼 침묵할 뿐입니다.

 

        호 수 !

 

      아.   그헣습니다.   세상엔 흐르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듯 멈춘 것도 있습니다.   쏘개놓은 장작개비를 안고

  

   울타리앞에 선 내게 겨울강은 왠지 흐르는 것보다 더 멈추는 것에 익숙해져 보입니다.

 

   쪼개보면 속살 드러내는 장작처럼, 들여다 보면 모든 흐름도 사실은 수많은 멈춤이 이어진 것 입니다.

 

         - 불을 피우고 누군가를 기다려야지.   만남도 결국 수많은 기다림이 이어진 것이니까.

 

           집으로 들어선 나는 이제 아궁이 속으로 장작을 집어넣기 시작 합니다.

 

           황토를 발라 만든 아궁이는 내가 사는 외딴집이 심장입니다.

 

           그 심장을 때로 나는 자궁이란 부르기도 합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   어머니 자궁 속에 있던 따뜻한 날을 떠올리며 나는 온몸으로 불을 쬡니다.

 

           아궁이와 친해지는 동안 사과나무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소리 없이 타오르는 사과나무는 실비 오는 소리나, 속으로 가라앉히는 슬픔같이 조용한 소리를 냅니다.

 

   침묵의 보랏빛 불꽃을 피워 올리는 사과나무와 달리 요란스런 소리를 내는

 

   나무들은 필시 가벼운 것들입니다.   잠시만 한눈 팔아도 튀어 나오는 방정맞은 불똥들은

 

   다 속 빈 나무들이 내던진 것입니다.

 

   사람 살이도 이어져 마침내 아름다운 선이 되듯 오랜 기다림 끝에 다가오는 만남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순백의 세상 속으로 다시 포르르, 새들이 날아오릅니다.

 

   이눈 속에 새들은 어디서 잤을까요?  

 

   언 땅에 뿌리박고 있는 나무들은 시린 발을 어떻게 참을까요?

 

   

            - 김재진 시인의  어른들이 읽는 동화 / 엄마 냄새 중에서 " 기다림 " 이란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