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만

길도 없는 길 위에 주저앉아서
노방에 피는 꽃을 바라보노니
내 생의 한나절도 저와 같아라.

 

한창때는 나도
열병처럼 떠도는 꽃의 화염에 젖어
내 온몸을 다 적셨더니라.
피에 젖은 꽃향기에 코를 박고
내 한몸을 다 주었더니라.

 

때로 바람소리 밀리는 잔솔밭에서
청옥 같은 하늘도 보았더니라.
또한 잠 없는 한 사람의 머리맡에서
한밤내 좋은 꿈도 꾸었더니라.

 

햇볕이 아까운 가을 양지녘에서는
풍문처럼 떠도는 그리운 시를 읽고
어쩌다 찾아온 친구에게는
속절없는 내 사랑의 말씀도 전했더니라.

 

이제 날 저물고
팔이 짧아 내 품에 드는 것도
부피 없고 무게 없고 다 지친 것뿐.
가슴의 애도 제물에 삭고
긴 밤의 괴로움도 제물에 축이 났어라.

 

이제 모질고 설운 날은 지나갔어라.
빈 집에 홀로 남은 옛날 아이는
따뜻한 오월의 어느 해 하루
툇마루를 적시는 산을 벗삼아
잔주름 풀어가는 강물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