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약장수가 뭐라고 떠벌리고 있다. 침을 튀기며 만병통치를 외치는 그 둘레에는 으레 어수룩한 친구들이 걸음을 멈추고 소일하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만병통치약을 자신은 먹지 않고 거리에 내가 팔기만 할 경우, 그의 혈색과 더불어 우리는 그가 파는 약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학자 E. 라모뜨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학문적으로 완벽한 업적들을 대했을 때 그 사람의 전 생애를 불교연구에 바치고 있는 듯한 바로 그 자신의 사상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스스로 문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을 보다 투병하게 정리한다면 ‘불교학을 다루는 사람들 그 자신의 문제는 그럼 어떻게 하고 잇는가?’로 요약할 수 있겠다.

   흔히들 사람과 작품(학문적인 업적이란 말로 바꾸어도 무방하다)을 별개의 것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종교를 다루는 분야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다. 종교가 메마른 이론이 아니고 살아 있는 행동이라면 마로가 행동이 여일(如一)해야 할 것이다. 대중 앞에서는 인과를 말하면서도 그 자신은 인과를 믿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위선자의 계열에 속하고 만다.

   그런 사람들의 말에는 사카린 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혓바닥 언저리에나 단맛을 적실 뿐 목구멍을 넘기면 오히려 해롭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분수는 모르고 걸핏하면 승단(僧團)이나 헐뜯는 일로서 학(學)의 후광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 자신은 재가불자로서 기본적인 오계도 지키지 못하면서 눈을 밖으로만 향하려고 든다. 이를 가리켜 자찬훼타(自讚毁他), 즉 자기 자랑만 하고 남을 헌다고 하던가?

   적어도 종교학을 다루는 사람은 신념의 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념은 안팎이 한결같은 정진에 뿌리박고 있다. 저 자신은 먹지 않은 채 남에게만 팔려는 거리의 약장수가 되어서는 만병통치를 할 수 없다.

   오늘을 사는 불자들이라면 다 같이 반성해 볼 일이다.

1969. 1. 19.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