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못 받아놓고들 있지만 사실 가을은 독서하기에 가장 부적당한 계절일 것 같다. 날씨가 너무 청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엷어가는 수목의 그림자가 우리를 먼 나그넷길로 자꾸만 불러내기 때문이다.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서 책장이나 뒤적이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고리타분하다. 그것은 가을 날씨에 대한 실례다.

   그리고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도 우습다. 아무 때고 읽으면 그때가 곧 독서의 계절이지. 여름엔 무더워서 바깥일을 할 수 없으니 책이나 읽는 것이다. 가벼운 속옷 바람으로 돗자리를 내다 깔고 죽침이라도 있으면 제격일 것이다. 수고롭게 찾아 나설 것 없이 출렁거리는 바다와 계곡이 흐르는 산을 내 곁으로 초대한다.

   8, 9년 전이던가, 해인사 소소산방(笑笑山房)에서 <화엄경 심회향품>을 독송하면서 한여름 무더위를 잊은 채 지낸 적이 있다. 그해 봄 운허노사에게서 <화엄경> 강의를 듣다가 <십회향품>에 이르러 보살의 지극한 구도 정신에 감읍(感泣)한 바 있었다. 언젠가 틈을 내어 <십회향품>만을 따로 정독하리라 마음먹었더니 그 여름에 시절 인연이 도래했던 것이다.

   조석으로 장경각에 올라가 업장을 참회하는 예배를 드리고 낮으로는 산방에서 독송을 했었다. 산방이라지만 방 하나를 칸 막아 쓰니 협착했다. 서까래가 내다뵈는 조그만 들창과 드나드는 문이 하나밖에 없는 방, 그러니 여름이 아니라도 답답했다. 그래도 저 디오게네스의 통 속 보다는 넓다고 자족했었다. 또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앞산이 내다보이는 전망이었다. 그것은 3백 호쯤 되는 화폭이었다.

   《화엄경》은 8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경전이다. <십회향품>은 그 중 아홉 권으로 되어 있다. 한여름 그 비좁은 방에서 가사와 장삼을 입고 단정히 앉아 향을 사르며 경을 펼쳤다. 먼저 개경게(開經偈)를 왼다.

   "더없이 심오한 이 법문/ 백천만겁에 만나기 어려운데/ 내가 이제 보고 듣고 외니/ 여래의 참뜻을 바로 알아지이다."

   경은 실차난타 한역의 목판본으로 읽었었다. 요즘은 한글 대장경으로 번역이 나와 있지만 그때는 번역이 없었다. 한글 번역이 있다 하더라도 표의문자가 주는 여운이며, 목판본으로 읽는 그 유연한 맛은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더러는 목청을 돋워 읽기도 하고 한자씩 짚어가며 목독하기도 했었다.

   비가 올 듯한 무더운 날에는 돌담밖에 정랑(변소)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겨왔다. 그런 때는 내 몸 안에도 자가용 변소가 있지 않으냐, 사람의 양심이 썩는 냄새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일체(一切)가 유심소조(唯心所造)니까…

   저녁 공양 한 시간쯤 앞두고 자리에서 일어서면 가사 장삼에 땀이 흠뻑 배고 깔았던 방석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비로소 덥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골짜기로 나가 훨훨 벗어버리고 시냇물에 잠긴다. 이내 더위가 가시고 심신이 날 듯이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해서 그해 여름 <십회향품>을 10여 회 독송했는데 읽을수록 새롭고 절절했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라면 그렇게 못 했을 것이다. 스스로 우러나서 한 일이라 환희로 충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목소리를 통해 나 자신의 근원적인 음성을 듣는 일이 아닐까.

1972. 8. 2.
글 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