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 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청마 유치환의 <심산(深山)>이라는 시다. 시가 뭣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런 읽을 때마다 내 생활의 영역에 탄력을 주는 이런 언어의 결정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턴가 말년을 어떻게 회향(廻向)할까를 생각했다. 새파란 주제에 벌써부터 말년의 일이냐고 탓할지 모르지만, 순간에서 영원을 살려는 것이 생명현상이 아니겠는가. 어떤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현재를 보다 풍성하게 가꾸어주는 수가 있다. <심산(深山)>은 내게 상상의 날개를 주어 구만리(九萬里) 장천(長天)을 날게 한다.

   할 일 좀 해놓고 나서는 세간적인 탈을 훨훨 벗어버리고 내 식대로 살고 싶다. 어디에도 거리낄 것 없이 홀가분하게 정말 알짜로 살고 싶다.

   언젠가 서투른 붓글씨로 <心散>을 써서 머리맡에 붙여놓았더니 한 벗이 그걸 보고, 왜 하필이면 궁상맞게 이를 잡느냐는 것이다. 할 일이 없으니 양지바른 바위에 앉아 이나 잡을 수 밖에 있느냐고 했지만, 그는 무위(無爲)의 자연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그런 경지에서 과연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불가에서는 조그마한 미물이라도 살생을 금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저쪽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끊어지는 일이니까.

   각설, 주리면 가지 끝에 열매나 따 먹고 곤하면 바위 아래 풀집에서 잠이 든다. 새삼스레 더 배우고 익힐 것도 없다. 더러는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안개에 가린 하계(下界)를 굽어본다. 바위틈에서 솟는 샘물을 길어다 차를 달인다. 다로(茶爐) 곁에서 사슴이 한 쌍 조을고 있다. 흥이 나면 옛노래나 읊을까? 낭랑한 노랫소리를 들으면 학이 내려와 너울너울 춤을 추리라.

   인적이 미치지 않은 심산에서는 겨울이 소용없다. 둘레의 모든 것이 내 얼굴이요 모습일테니까.

   일력(日曆)도 필요 없다. 시간 밖에서 살테니까.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얽어매지 못할 것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순수한 내가 있는 것. 자유는 홀로 있음을 뜻한다.

   아,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어디에도 거리낄 것 없이 산울림 영감처럼 살고 싶네.

   태고의 정적 속에서 산신령처럼 무료히 지내고 싶네.
 
1972. 3
글 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