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려는지 먹구름이 낮게 내려앉고 골짝에서는 차가운 기류가 올라오고 있다. 서둘러 읍내 철물점에 가서 눈을 치우는 가래를 하나 사왔다. 이곳은 눈 고장이라 다른 데에 없는 연장들이 있다. 손잡잇감이 마땅치 않아 손수 만들지 않고 가게에서 사온 것이다.

   난로에 장작을 모아 놓으면 활활 타오르는 소리도 좋지만, 한 참 있으면 난로 위에 올려놓은 돌솥에서 물 끓는 소리 또한 훈훈한 실내의 정취를 아늑하게 거들어준다. 산에 살면 오관 중에서도 특히 청각이 예민해지는데, 한밤중에 기러기떼 날아가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깰 때가 더러 있다.

   '솨솩 쇄쇗 솨솩 쇄쇗....'

   풀이 선 옷깃이 스치는 듯한 이 소리. 이 오밤중에 추위를 피해 남녘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날갯짓 소리가, 마치 어떤 혼령이 허공을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려오는 것 같아 나는 퍼뜩 맑은 정신이 든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내 영혼의 무게 같은 것을 헤아리게 된다. 그리고 남은 세월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기러기 떼를 뒤따라간다.

   눈 치는 가래를 사온 김에 눈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 대숲에 푸실푸실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나는 좋아한다. 이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소금장수 이야기를 듣던 기억이 문득 되살아난다. 똑같은 이야기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 졸이며 새롭게 들리던 그런 옛이야기, 고전이란 바로 이런 성질의 것이 아닐까 싶다.

   며칠 동안 펑펑 눈이 쏟아져 길이 막힐 때, 오도 가도 못하고 혼자서 적막강산에 갇혀 있을 때, 나는 새삼스럽게 홀로 살아 있음을 누리면서 순수한 내 자신이 되어 둘레의 사물과 일체감을 나눈다. 눈 위에 찍힌 짐승 발자국을 대하면 같은 산중에 사는 동료로서 친근감을 느낀다.

   그리고 눈이 멎어 달이 그 얼굴을 내보일 때, 월백 설백 천지백(月白雪白天地白)의 그 황홀한 경계에 나는 숨을 죽인다.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온 천지가 희다고밖에 더 무엇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옛 시인의 감성을 넉넉히 짐작할 만하다.

   나는 한겨울 개울가에서 얼음장 속으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한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그 청랭한 소리가 내 핏줄에 이어져 한없이 정화시켜 주는 것 같다. 얼음장 속에서 버들강아지가 움트는 것을 보면 잠시도 멈춤이 없는 생명의 신비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살아 있는 모든 이웃들이 다 행복 하라 태평 하라 안락 하라.

   여름날 땀을 흘리면서 한참 고갯길을 오르다가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때, 가까이서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는 오장육부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소나무 아래서 솔바람 소리를 베고 낮잠 한숨 자고 싶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산중의 풍류다. 제 발로 한 걸음 한걸음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맑은 복이다.

   나는 또 겨울 숲을 사랑한다. 신록이 날마다 새롭게 번지는 초여름의 숲도 좋지만, 거치적거리는 것을 훨훨 벗어 버리고 알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는 나무들의 당당한 기상에는 미칠 수 없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저마다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도 이런 숲의 질서를 배우고 익힌다면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한 그루의 나무를 대할 때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도 함께 비춰 볼 수 있다면 나무로부터 배울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겨울 숲에서 어정어정 거닐고 있으면 나무들끼리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빈 가지에서 잎과 꽃을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나무들은 겨울잠에 깊이 빠져 있는 것 같지만, 새봄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눈 속에서도 새 움을 틔우고 있는 걸 보라. 이런 나무를 함부로 찍거나 배면 그 자신의 한 부분이 찍히거나 베어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나무에도 생명의 알맹이인 영靈이 깃들어 있다. 나무를 사랑하라, 사랑의 메아리가 우리 마음에 울려올 것이다.

   해와 달은 모든 생명의 신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주를 지탱하는 음양관계뿐 아니라, 해와 달이 없다면 생명이 존속될 수 없다. 고대 사회에서 해와 달을 신격화한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불교 경전에서는 해와 달을 일광日光보살, 월광月光보살로도 표현하고 있다.

   그 전부터 느끼고 말해 온 바이지만(물론 주관적인 견해다), 해는 지는 해가 좋고 달은 떠오르는 달이 좋다. 해는 지평선이나 바다로 지는 해가 아름답고 장엄하다. 달은 아무래도 산마루에서 떠오르는 자태가 사랑스럽다.

   내 기억의 언저리에는 아름다운 일몰日沒의 장면이 몇 폭 차곡차곡 간직되어 있다. 문득 지금 상기되는 것은, 태평양 연안에서 노부부가 간이 의자를 차에 싣고 와서 가지런히 않아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장면이다. 그 지점은 나도 자주 가서 일몰을 지켜보곤 했었는데, 그날은 마침 비가 갠 날이라 붉은 해의 윤곽이 선명해서 수평선에 잠기는 순간순간 하늘과 바다에 펼쳐지는 빛의 조화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부부가 하루 일을 마치고 바닷가에 나와 수평선으로 지는 해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그 모습이, 내게는 그날의 일몰과 함께 인생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일몰로 간직되어 있다.

   노을은 인도양의 진주로 불리는 스리랑카의 티크나무 숲에서 붉게 붉게 타오르던 그때의 노을보다 더 장엄한 노을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해가 지고 난 다음 하늘이 벌겋게 물드는 현상을 노을이라고 하는데, 한 인생이 살다가 간 자취도 노을처럼 남을 거라고 여겨진다. 후회 없이 잘 살아야 그의 자취인 노을도 아름답게 비쳐질 것이다.

   나는 또 맨발로 밭에 들어가 흙 밟는 그 감촉을 좋아한다. 여름날 산그늘이 내릴 무렵에 채소밭에서 김을 맬 때, 맨발이 되어 밭 흙을 밟고 있으면 간질간질한 그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땅 기운이 내 몸에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흙이 생명의 바탕임을 알아야 한다. 마른 씨앗을 흙에 묻어 두면 거기서 움이 트고 잎이 펼쳐지고 꽃을 피우다가 열매를 맺는다.

   흙에서 멀수록 병원과 가까워진다는 말은 어김없는 진리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돌아가 삭아질 곳 또한 이 흙이다. 이런 흙을 더럽히면 자신의 뿌리가 그만큼 허약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명심해야 한다.

   누가 먹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물어오면 나는 선뜻 대답을 못한다. 먹고 싶은 것이 별로 없다. 내 삶의 둘레를 쓸고 닦아낸 다음, 차분하고 한가로운 기분으로 마시는 차를 나는 가끔 즐기고 있다. 오 참, 요즘 물미역을 몇 차례 맛있게 먹었다. 물미역은 뻐세지기 전 소금을 약간 쳐서 찬물로 씻어낸 다음, 데치지 않고 날것 그대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산중에서도 바다의 갯내와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미역은 잎은 떫고 줄기가 오들오들 씹히는 맛도 있고 달다.

   밝아오는 여명의 창에 눈을 두고 꼿꼿이 앉아 소리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하루의 일과 중에서도 나는 가장 사랑한다. 이런 시간에 나는 내 중심에 있다. 그리고 밝은 창 아래 앉아 옛 글을 읽는 재미 또한 내게서는 빼놓을 수 없다. 그 속에 스승과 친구가 있어 내 삶을 시들지 않게 한다.

   방이 식었구나, 아궁이에 먹이를 넣어 주어야겠다.
 
1994. 1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