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오후의 한때를 서쪽 창으로 비껴드는 밝은 햇살 아래 앉아 편지도 읽고 책도 읽으면서 지극히 담담하게 지내고 있다. 두 평도 채 안 되는 좁은 방이기 때문에 홀로 앉아 있으면 더욱 아늑하다.

    한 보름 전 큰절 도성당에 들렀다가 빨갛게 열매가 매달려 있는 산수유 한 가지를 꺾어 왔었다. 조그만 항아리에 물을 담고 꽃아 창 곁에 놓아두었더니, 며칠 전부터 노란 꽃이 피어나고 있다. 노란 꽃과 빨간 열매를 함께 보기란 드문 일인데, 따뜻한 방안의 온도를 봄으로 잘못 알고 꽃이 피어난 모양이다.

    못할 일을 한 것 같아 산수유한테는 미안한 생각마저 들면서도, 분정항아리와 산수유의 꽃과 열매가 아름다운 빛의 조화를 이루어, 바라보고 있으면 잔잔한 기쁨이 배어난다. 어지간히 부딪쳐도 까딱없던 열매가, 꽃이 피어나면서부터는 조금만 건드려도 가지에서 떨어져버린다. 새로운 꽃이 피어나자 묵은 열매는 자리를 비켜주는 이 생명의 질서. 말이 없는 가운데 지켜지는 생명의 질서 앞에 숙연해진다. 큰방에서 오전 일과를 마치고 나면 아궁이 두 군데에 군불을 지펴 두고, 아래채에 내려가 점심을 삶아 먹는다. 지어 먹는다고 해야 할 텐데 언제부터인지 나도 모르게 삶아 먹는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쓰고 있다. 하기야 곡식을 삶아야 밥이 되긴 하지만.

    점심 공양 마치고는 운동 삼아 아랫절에 내려가 우편물도 챙기고, 인근에 장날이면 장도 보아올 대가 있다. 엊그제도 30리 밖에 있는 광천장에 가서 쇠갈퀴 세 자루, 싸릿대로 엮은 삼태기 하나, 아궁이에서 재를 쳐낼 때 쓸 고무 양동이를 하나 사왔다.

    오후 한때 그 휴식의 공간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펼쳐 들고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환상이 여행을 떠나는 그런 시간이 더러 있다. 오늘은 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행자의 두 모습에 대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이어갔다. 전에도 몇 번 읽은 적이 있는데 읽을 때마다 그 감흥은 새롭다. 고전(古典)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다.

    ‘백월산의 두 성인 성도에 이런 기록이 있다’라고 저자인 일연 스님은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신라 수사군의 북쪽에 있는 백월산 무등곡에 들어갔다. 달달박박은 북쪽 고개의 사자바위를 차지하여 거기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그의 거처를 판방이라 했으며, 그의 친구인 노힐부득은 남쪽 고개의 돌무더기 아래 시냇가에 승방을 짓고 살았으므로 뇌방이라 했다. 그들은 각기 북쪽과 남쪽 다른 암자에 살면서 부득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을 열심히 섬겼고, 박박은 아미타불을 예경하면서 정토왕생을 염원했다.

    이렇게 지내기 3년째 되던 어느 봄날 어둑어둑 날이 저무는데, 나이 스물쯤 되어 보이는 자태가 썩 아름다운 한 남자가 북암(北痷)에 찾아와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바쳤다고 <유사>에는 싣고 있다.
‘날 저문 산중에서 갈 길 아득하고
길 잃고 인가 머니 어찌하리요
오늘 밤 이곳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하신 스님은 화내지 마세요.‘
    박박은 한마디로 여인을 거절한다.

    “수도하는 곳은 청정해야 하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이곳에서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그는 인정사정없이 문을 꽝 닫고 들어가 버린다.

    북암에서 거절을 당한 낭자는 남암으로 찾아가 하룻밤 묵어가기를 사정한다. 부득은 갑작스런 여인의 출현에 놀라면서 말했다.

    “그대는 이 밤에 어디서 오는 길이오?”

    여인은 시 한 수를 지어 바친다.
‘첩첩 산중에 날은 저문데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소
송죽의 그늘은 한층 그윽하고
시냇물 소리는 더욱 차갑소
길을 잃고 찾아왔다 마시오
바른 법 일러주러 왔으니
부디 이내 청을 들어주시고
길손이 누군지는 묻지 마세요.‘
    이 말을 들은 부득은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여인과 함께 밤을 새울 곳이 아니오만, 깊은 산골짜기에 밤이 어두웠으니 문전박대할 수가 없구려. 중생의 뜻에 따르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이니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오.”

    밤이 깊도록 부득은 자지 않고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염불하기를 쉬지 않았다. 새벽이 될 무렵 낭자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부득을 불렀다.

    “내게 갑자기 산기가 있으니 죄송하지만 스님께서 자리를 좀 마련해 주세요.”

    부득은 고통스러워하는 여인을 가엾이 여겨 촛불을 들고 시키는 대로 거들어 주었다. 여인은 해산을 마치자 이번에는 물을 데워 목욕시켜 주기를 청했다. 부득은 민망스러움과 두려움이 엇갈렸지만, 산모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겨 목욕할 통을 가져다가 물을 데워서 목욕까지 시켜주었다.

    이때 문득 통 속의 물에서 향기가 진하게 풍기더니 그 물이 금물로 변했다. 부득이 크게 놀라는 것을 보고 여인은 말했다.

    “스님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십시오.”

    부득은 마지못해 그 말에 따랐다.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고 살결이 금빛으로 변했다. 목욕통 곁에 전에 없던 연화대(蓮花臺)가 있었는데 여인은 부득에게 거기 앉기를 권했다.

    “나는 관세음보살인데 이곳에 와서 스님의 뜻이 갸륵한 것을 보고 대보리(大菩提)를 이루어준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여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날이 밝자 북암의 박박은 지난 밤 일이 궁금해서 남암으로 부득을 찾아온다. 연화대에 앉아 미륵불이 되어 광채를 발하고 있는 부득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자신도 제도해 줄 것을 간청한다. 박박은 부득의 지시로 통 속에 남아 있는 금물로 목욕을 하니 그의 소원대로 아미타불이 되어 함께 구름을 타고 가버린 것으로 이야기는 맺고 있다.

    환상의 여행에서 깨어나 이제는 정리를 해보자, 수행자는 구도형과 봉사형 두 유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여기 달달박박은 서슬이 푸른 구도형이고 노힐부득은 온유한 봉사형이다. 적절한 비교가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헤르만 헷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유형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봉사형이 이상적인 수행자로 보이게 마련이지만, 그런 봉사가 있기까지는 투철한 자기 질서 안에서 거듭 태어남이 전제되어야 한다. 탐구(智)와 사랑(悲)이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것 같지만, 지혜가 없는 자비는 맹목이기 쉽고, 사랑이 없는 지혜 또한 메마른 관념에 빠지기 쉽다.

    누가복음에서 나사로의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될 듯싶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면 동생인 마리아는 발치에 앉아 열심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언니인 마르타는 음식을 장만하기에 바쁘다. 바쁜 일손을 거들어주지 않는 동생을 원망한 마르타를 보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밤늦게 찾아오는 나그네가 관세음보살 아니라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를 가차 없이 쫓아버리겠다 .예절을 모르는 보살과 부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은 내 질서, 투철한 내 삶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89 . 2>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