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태풍이 할퀴고 간 뒤치다꺼리를 하느라고 꼬박 사흘을 보냈다. 물에 떠내려간 개울가의 징검다리는 아직도 손을 대지 못했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이번 것은 그 위력이 아주 대단했다. 태풍을 맞이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세상에 공것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이다. 맑은 날 산 위에서 툭 트인 전망을 바라보며 즐긴 그 보상으로 휘몰아치는 비바람도 모두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뒤따르고, 좋은 일 뒤에는 언짢은 일도 있게 마련이다. 이런 현상이 우주질서 아니겠는가.

    태풍이 지나가더니 밤으로 풀벌레소리가 여물어졌다. 산 위에는 선들바람이 불고, 산빛이 조금씩 바래져간다. 초가을의 채취 같은 것이 풍기기 시작한다. 지난 여름에 만난 몇몇 얼굴들이 떠오른다. 내가 찾아가 만난 것이 아니라 절 안에서 만난 사람들.

    송광사에서는 해마다 여름 휴가철에 ‘선(禪) 수련회’가 열리는데, 지난 여름에도 4박5일씩 4차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5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거쳐 갔다. 말로만 듣던 참선을 바른 자세로 하려면 초심자들은 힘이 든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밤 9시에 취침하기까지 짜여진 승가의 일과에 따라야 하므로 쉬운 일은 아니다.

    참가자들은 사전에 그만한 각오를 하고 오기 때문에 다들 잘 참고 견딘다. 수련을 마치고 하산하는 날에는 아쉬워하면서 산을 내려간다. 그런데 그중에는 이틀을 견디지 못한 채 뭐라고 구실을 붙여 도중에 탈락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주최측에서 보면 해마다 겪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 못 견뎌 하는지를 환히 알 수 있다. 이른바 명문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탈락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또래의 이웃들은 잘 참고 견디는데 명문대학에 다니는 그들은 참고 견디지를 못한다. 머리는 잘 돌아갈지 모르지만 인내력과 의지력이 약하다.

    수련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과 마음으로 하는 자기 극복의 단련이다. 우리가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갈 대 어지 머리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머리보다는 끈질긴 인내력과 강인한 의지력이 더 필요할 때가 많다. 수련의 탈락자를 대할 때마다 오늘날 병든 교육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의 허구성과 나약함에 대해서 새삼스레 회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루는 땀을 뻘뻘 흘리며 씩씩거리고 올라온 어린 ‘거구들’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중학교 1학년에 다닌다는 아이한테 몸무게를 물으니 75kg이라 하고, 그의 동생인 국민학교 3학년생은 53kg이 된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평균치에도 못 미치는 겨우 60kg.

    아이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한테, 어떻게 해서 이런 우량아들로 기웠느냐고 그 비법을 물었더니, 우유를 가공해서 먹였더니 3년 전부터 체중이 불어났다고 했다. 75kg 중학생한테, 너희 반에 너보다 덩치가 큰 애가 도 있느냐고 했더니 셋이나 된다고 했다. 구김살 없이 자란 아이들이라 귀엽고 대견했지만 체중관리를 잘못한 엄마한테 초면이 아니라면 잔소리를 해주고 싶었다.

    바야흐로 국제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들의 체격도 국제급으로 변모되고 잇다. 종래 채식 위주의 우리 식생활이 육식 위주로 바뀌면서 이상 비만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따라서 심장병과 당뇨와 고혈압 등의 문명병이 성인들만이 아니고 어린이들한테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얼마 전에 한 연구보고서가 소개한 바도 있지만, 장수의 비결은 결코 기름지게 잘 먹는 데 있지 않다. 물론 오래 사는 것만이 좋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사는 동안은 건강할 수 있어야 한다. 건강하려면 덜 기름지게 그리고 좀 모자라게 먹어야 한다. 일단 부풀어버린 다음에 줄이려면 거기에는 갖은 고통이 따른다. 부풀기 전에 미리미리 알아서 덜 먹어야 한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니까.

    한국인의 얼굴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말을 언젠가 아는 사진작가로부터 들은 일이 있는데, 이 말의 메아리가 아직도 내 기억의 들녘에 울리고 있다. 이 땅에서 진정한 한국인의 얼굴이 사라져간다니 기막힌 일이다. 우리는 요 근래 먹고 거처하고 입는 일이 너무나 빨리 서양식으로만 치닫고 있다. 그러니 ‘얼의 꼴’인들 제 모습을 지닐 수 있겠는가.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우리는 이제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마하트마 간디의 몸무게는 겨우 40kg에 지나지 않았다. 그 가벼운 몸 안에 ‘위대한 혼(마하트마)’이 깃들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충남 대천에서 왔다는 한 떼의 사람들이 몹시 무덥던 날 찾아온 일이 있다. 무슨 일로 이 더위에 여기까지 올라왔느냐고 하니, 텔레비전에 나온 스님을 보러왔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길을 잘못 들었으니 저 등 너머 암자로 가보라고 일러주었지만 뒷맛이 씁쓸했다.

    그 무더운 날 텔레비전에 출연한 사람을 ‘현품대조’하러 왔다니, 세상은 아직도 천진하고 어수룩하구나 싶었다. 충남 대천에서 왔다는 그 천진한 분들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텔레비전교(敎)를 믿는 신자들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영상매체를 통해 그만큼 세뇌를 당하고 있는 것.

    연유인즉, 한 방송국에서 수련을 취재하여 여름휴가를 이와 같이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기에 의논 끝에 허락했었다. 아는 내 고집으로 출연을 거절하다가 강의를 마치고 그들의 사정에 못 이겨 몇 마디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그런데 ‘납량특징 - 아무개 스님의 산거생활’이라고 예고가 나왔었다. 물론 그 프로의 실제 타이틀은 선심초심(禪心初心)이었다. 이러니 겉 다르고 속 다른 보도가 된 것.

    이런 일들로 인해서 내 천진과 어수룩함도 깨우침을 받았다. 두 번 속으면 그때는 갈 데 없는 바보가 된다.

    가을의 문턱에서 지난 여름을 되돌아본다. 우리가 겪는 일들은 우리 삶의 내용이 된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된다. 여름이여, 잘 가게

<86 . 9. 12>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