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길상사의 법회 때였다. 법회를 마치고 나면 내 속은 청 빈다.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쏟아 놓고 나면 발가벗은 내 몰골이 조금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런 때는 혼자서 나무 아래 앉아 있거나 흐르는 개울가에 앉아 개울물 소리를 듣고 싶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나는 홀로 있고 싶다.

    남자 불자 한 분이 법회가 끝나자마자 내 뒤를 바짝 따라 오더니 가사 장삼을 벗어 놓기가 바쁘게 가지고 온 책을 한 권 펼치면서 ‘좋은 말씀’을 한마디 거기에 적어 달라고 했다. 나는 방금 좋은 말이 될 것 같아 쏟아 놓았는데 그에게는 별로 좋은 말이 못 된 것 같았다.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화두 삼아 지닐 테니 부득부득 써 달라고 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써 주었다. 그는 이 말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다시 좋은 말씀을 써 달라고 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이런 사람에게 더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수 없이 그의 요구대로 ‘좋은 말씀’이라고 종이에 가득 찰 만큼 크게 써 주었다.

    우리는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 바쁜 일상을 쪼개어 여기저기 찾아다닌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리 번번이 실망하기 일쑤다. 도대체 그 좋은 말씀이란 무엇인가? 또 어디에 좋은 말씀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 좋은 말씀을 듣고자 하는가?

    아무리 좋은 말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나 자신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좋은 말씀도 내게는 무연하고 무익하다. 그리고 좋은 말씀(좋은 가르침)은 사람의 입을 거쳐서만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천지만물이 그때 그곳에서 좋은 가르침을 펼쳐 보이고 있지 않은가.

    요즘은 내 거처를 찾는 사람이 없지만, 불일암 시절에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았다. 그대 찾아온 이유가 하나같이 좋은 말을 들으러 왔다고 했다. 그런 때면 나도 한결같이, 모처럼 산을 찾아왔으니 우선 그 좋다는 말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일러 준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지금가지 살아오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좋은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지금가지 얻어 들은 좋은 말씀만 가지고도 누구나 성인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재서 좋은 말씀을 매번 또다시 들으려고 하는가.

    말씀(가르침)이란 그렇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삶에 이어지지 않으면 말이란 공허하다. 자기 체험이 없는 말에 메아리가 없듯이 그 어떤 가르침도 일상적으로 생활화되지 않는다면 무익하다.

    새 말씀을 들으려면 지금까지 얻어들어 온 말씀들로부터 풀려나야 한다. 거기에 갇혀 있거나 걸려 있으면 새로운 가르침이 들어설 수 없다. 예술의 용어를 빌리자면 ‘창조적인 망각’이라고 한다. 텅텅 비워야 비로소 메아리가 울린다는 소식이다.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한다. 좋은 친구란 주고받는 말이 없어도 마음이 편하고 투명하고 느긋하고 향기로운 사이다. 그 밖에 또 무엇을 찾는다면 그것은 헛된 욕심이고 부질없는 탐욕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좋은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서 있는 바로 지금 그곳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고 있다면, 그 자리에 좋은 말씀이 살아 숨 쉰다. 명심하라.

글출처 : 아름다운 마무리(법정스님 : 문학의 숲)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