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을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로 불렀다. 평원에 들짐승들의 자취가 뜸해지고 수그러든다. 그렇지만 모두 다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한동안 비웠다가 때가 되면 다시 채워질 것들이다.

    11월이 내 둘레에서는 개울가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달이다. 첫서리가 내린 아침 적갈색 다기를 내놓았는데, 며칠을 두고 써 보아도 정이 가지 않는다. 쓰임새도 좋고 모양도 그만한데 웬일인지 그릇에 마음이 붙지 않는다.

    이 일을 두고 생각하니 인간사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오랜 세월 오며 가며 지내도 정이 가지 않고 떨떠름한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오래 사귀지 않았는데도 서로 마음의 길이 이어져 믿고 따르는 사이도 있다. 한때는 맹목적인 열기에 들떠 결점도 장점으로 착각하기 일쑤지만 그 열기가 가시고 나면 밝은 눈으로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세월이 눈을 뜨게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람을 포함한 동물보다 나무와 꽃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산에서 살면 동물보다 식물을 더 가까이 대할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식물은 동물에 비해서 그 속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고 소박하고 지극히 자연스럽다. 정직하고 진실한 덕과 시원한 그늘과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나무와 꽃들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그 시기를 잘 안다. 결코 어기는 일이 없다.

    오두막 뜰가에 소나무가 네 그루 정정하게 자라고 있는데, 그중 한 나무에 전에 없이 솔방울이 많이 매달렸다. 웬일인가 싶어 살펴보니 몇 해 전 폭설로 한쪽 가지가 꺾여나간 바람에 맞은쪽 가지의 무게 때문에 나무가 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나무는 위기를 느끼고 자신의 뒤를 잇도록 씨앗이 담긴 솔방울을 많이많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걸 보면 탐욕스런 사람들보다는 나무쪽이 훨씬 지혜롭다. 이 산중에서 함께 사는 인연으로 단단한 물푸레나무로 받침대를 해 주었다. 내가 곁에서 거들 테니 걱정 말고 잘 지내라고 일러 주었다. 그 소나무는 가지에 보름달을 올려 한밤중에 나를 불러내었다. 이래서 산에서 사는 나는 사람보다도 나무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고대 인도의 위대한 왕, 아쇼카는 모든 국민들이 최소한 다섯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돌보아야 한다고 선포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치유력이 있는 약나무와 열매를 맺는 유실수와 연료로 쓸 나무, 집을 짓는 데 쓸 나무, 꽃을 피우는 나무를 심을 것을 권장했다. 아쇼카 왕은 그것을 ‘다섯 그루의 작은 숲’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지금까지 몇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돌보았는가. 우리나라 기후로는 입동 무렵이 나무를 옮겨심기에 가장 적합한 때다. 그리고 나무들이 겨울잠에 들기 시작하는 이때가 거름을 주기에도 알맞은 때다. 나무를 심고 보살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글출처 : 아름다운 마무리(법정스님 : 문학의 숲) 中에서.....

주(註)
아쇼카 : 인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으로 집권 후 소승불교로 개종하였으며, 동물의 권리를 부여하고 비폭력을 진흥하였다. 젊어서부터 불교와 관계가 깊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왕위에 오른 이후 자애와 대비심에 충만한 자비의 왕으로 탈바꿈하였다. 인도에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존중과 평화의 정신을 뿌리내렸다. 이도의 가장 위대한 황제로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