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그전에 살던 암자에 가서 며칠 묵고 왔다. 밀린 빨랫거리를 가지고 가서 빨았는데, 심야전기 덕에 더운 물이 나와 차가운 개울물에서보다 일손이 훨씬 가벼웠다. 탈수기가 있어 짜는 수고도 덜어 주었다. 풀을 해서 빨랫줄에 널어 말리고 다리미로 다리는 일도 한결 즐거웠다.

    다락에서 아직도 쓰이고 있는 두 장의 걸레를 발견하고 낯익은 친구를 만난 듯 만감이 새로웠다. 이 걸레는 이 암자가 세워진 그날부터 함께 지내 온 청소 도구이다. 1975년 10월에 이 암자가 옛터에 새로 지어졌는데 그때 한 노보살님이 손수 걸레를 만들어 가져 오셨다.

    지금은 대개 타월을 걸레로 쓰지만 30년 전인 그 시절만 해도 해진 옷을 버리지 않고 성한 데를 골라 띄엄띄엄 누벼서 걸레를 만들어 썼다. 그때 대여섯 장 가져오셨는데 아직도 두 장이 남아 세월을 지키고 있다. 빨아서 삶았더니 아직도 말짱했다.

    그곳에는 내가 다래헌 시절에 쓰던 양은 대야 두 개가 아직도 건재하다. 하나는 발을 씻거나 걸레를 빨 때 쓰는 하복대야이고, 이보다 조금 큰 것은 상복대야로 세수를 할 때 쓴다. 그때 무슨 생각에서였던지 하복대야 가장자리에 ‘67. 12. 3.’이라고 새겨 놓았다. 못을 대고 장도리로 또닥거려 점선으로 새겨 놓은 것이다.

    37년 동안 세월의 풍상에 씻겨 많이 찌그러지고 벗겨지기도 했지만 아직도 대야로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것이 시주 물건을 귀하게 여긴 전통적인 승가의 가풍이다. 그 시절에는 지구 생태계도 환경문제도 오늘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물론 요즘은 절에서도 이런 검약한 가풍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넘치는 물량 공세가 우리 정신을 병들게 한다.

    그 많은 것을 차지하고도 고마워하거나 만족할 줄을 모른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에 정신과 눈을 파느라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여유마저 잃어가고 있다.

    그곳 위채 부엌문 한쪽 기둥에는 낡은 거울이 하나 걸려 있다. 가로 22센티미터, 세로 40센티미터, 뒤쪽 판자에 붓글씨로 ‘72년 7월 13일 손수 삭발 기념’이라고 씌어 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다. 1972년 7월 13일 이전에는 나도 삭발할 때 남의 손을 빌렸었다. 때가 되면 우리 방에 와서 삭발해 주던 스님이 무슨 일로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마음을 내어 손수 삭발을 시도했다. 한 군데도 잘못 베지 않고 말끔하게 삭발을 하고 나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 전까지는 혼자서 산에 들어가 살면 삭발 일이 은근히 걱정이었는데 손수 삭발을 할 수 있어 대단히 기뻤다. 그 길로 동대문 시장 유리 집에 가서 지금 거울을 사 온 것이다. 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삭발뿐 아니라 내 얼굴에 내린 세월도 함께 읽으면서 지내 왔었다.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

    거기에는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 흔적에서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

글출처 : 아름다운 마무리(법정스님 : 문학의 숲)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