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시인(是認)이란 직종이 따로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시를 읊고 지었다. 제대로 된 선비(그 시절의 지식인)라면 시(詩), 서(書), 화(畵)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보편적인 교양이었다.

    ‘승려 시인’이란 말도 예전에는 없었다. 경전을 읽고 어록을 읽을 수 있는 스님들은 그 자신도 삶의 노래인 시를 짓고 즐겼다. 시(詩)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말씀 언(言)’ 변에 ‘절 사(寺)’ 자이다. 절에서 수행자들이 주고받는 말이 곧 시라는 뜻이다.

    바람과 달과 시냇물과 나무와 새와 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산중에서는,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언어의 결정체인 시(詩)의 분위기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선문답도 논리적으로 비약은 심하지만 시의 형식을 빌린 문답이다.
 

지는 꽃향기 골짜기에 가득하고
우짖는 새소리 숲 너머에서 들려온다
그 절은 어디 있는가
푸른 산의 절반은 흰 구름이어라

늦은 봄날 절 안의 한가로운 풍경이다. 꽃이 지고 새소리 들려오는 곳, 그런 절은 어디 있는가하고 묻는 이에게 푸른 산의 절반은 희 구름이라고 슬쩍 비켜서 답한다. 속세의 먼지가 닿지 않는 흰 구름 속에 묻혀 있는 절이므로 더욱 신선하다.

    서산대사 휴정 스님이 어느 산에서 읊은 이다.
 

초가는 낡아 삼면의 벽이 없는데
노스님 한 분 대평상에서 졸고 있다
석양에 성긴 비 지나가더니
푸른 산은 반쯤 젖었다

다 허물어진 암자에 사는 노스님의 모습이 그림 같다. 노스님이라 좌선이 곧 졸음으로 이어진 것. 뻣뻣하게 곧은 자세로 앉아 있다면 노스님답지 않다. 조는 그 속에서 선정삼매를 이룬다. 해질 무렵 한 소나기 지나가자 반쯤 젖은 푸른 산이 대평상에서 졸고 있는 노스님을 받쳐 주고 있다. 역시 휴정 스님의 ‘초옥(草屋)’이란 시다.

    요즘은 큰 절과 암자를 가릴 것 없이 다들 물질적으로는 풍족하게 살기 때문에 퇴락해 가는 절을 만나기 어렵다. 그 속에서 사는 처지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으로 보면 번쩍거리는 절보다는 얼마쯤 퇴락해 가는 절의 모습이 그윽하고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벽이 무너져 남쪽 북쪽이 다 트이고
추녀 성글어 하늘이 가깝다
황량하다고 말하지 말게
바람을 맞이하고 달을 먼저 본다네 

조선시대 환성 지안 스님의 시인데, 곧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에 살면서도 궁기가 전혀 없는 낙천적인 삶의 모습이다. 벽이 무너지고 추녀가 벗겨져 나갔지만 도리어 그 속에서 자연을 가까이 할 수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하늘과 바람과 달을 집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예전 수행자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곧 하늘과 땅, 산과 강을 큰 집으로 여겼던 것이다.

    옛것과 낡은 것은 아름답다. 거기 세월의 향기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글출처 : 아름다운 마무리(법정스님 : 문학의 숲) 中에서.....